#. 지난 8월 스타트업 뉴빌리티의 직원 6명은 사우디아라비아 ‘옥사곤’이 조성될 사우디 타부크로 향했다. 이곳엔 첨단 도시 ‘네옴시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팔각형 모양의 세계 최대 수상 부유식 산업단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뉴빌리티의 자율주행 로봇 ‘뉴비’ 3대는 공사 현장 직원들의 밥과 물품을 날랐다. 이달에는 6명의 직원이 새로운 주문 앱을 적용하러 다시 사막으로 향했다.

#. 체력을 겨루는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은 스타트업 갤럭시코퍼레이션의 손에서 탄생했다. 82개국에서 ‘톱 10’ 진입 기록을 세웠는데, 중동 지역에선 특히 인기였다. 이 회사의 조성해 수석리더와 중동팀 4명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름부터 현지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피지컬: 100을 올림픽 형태로 개최하는 방안을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 현지 관계자들과 협의했다.
 그래픽=이은현 기자
그래픽=이은현 기자
스타트업의 ‘오일머니 캐기’ 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올 상반기 사우디와 UAE에서 다양한 업무협약(MOU) 체결 소식이 쏟아졌다. ‘보여주기식 투자 이벤트’, ‘일회성 만남’이란 일각의 비판을 뚫고 각 업체가 현지 진출과 함께 사업 성과를 하나둘씩 만들어내고 있다. 아예 현지 지사를 설립하거나 중동 근로자를 채용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현지 채용·지사 설립 ‘봇물’

호텔 운영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 H2O호스피탈리티는 지난 21일 사우디 지사를 설립했다. 일본, 싱가포르에 이은 세 번째 해외 지사다. 이들은 10월부터 UAE 아부다비의 5성급 호텔 그랜드밀레니엄알와다에 서비스 공급을 시작했다. 관광을 새 먹거리로 삼는 중동 국가들은 호텔 사업 수요가 크다. 이웅희 H2O 대표는 “중동 경제사절단 등 회사에 주어진 기회를 모두 살려 안면을 텄다”고 말했다. H2O는 사우디와 UAE에 걸쳐 인력 5명을 상주시키기로 했다.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뤼튼테크놀로지스는 두바이에서 활동하고 있다. 두바이는 외국인 비율이 90%에 달하는 도시다. AI 툴빌더와 챗봇 등을 보유한 뤼튼은 9월부터 UAE 정부 산하 두바이미래재단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거주민에게 특화된 생성형 AI 기반 포털을 만든다는 목표로, C레벨 2명을 포함해 총 4명이 프로젝트를 전담하고 있다. 베스텔라랩은 킹 압둘아지즈 국제공항, 킹 압둘라 금융지구의 주차 관제를 도맡는 현지 기업과 협력한다. 주차장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공급하는데, 정상수 베스텔라랩 대표와 글로벌팀 한 명이 두 달간 리야드에서 지내며 이뤄낸 성과다. 현재는 사우디인 채용에 집중하고 있다.

민관 ‘제2 중동신화’ 시동

정부도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트업의 중동 진출을 돕고 있다. 지난 3월 사우디 최대 스타트업 축제 ‘BIBAN 2023’에 참여한 중소벤처기업부는 현지 투자부와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개소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리야드 GBC는 지난달 24일 문을 열었다. 총 26개 스타트업이 입주를 준비하고 있는데 현재 10개사에서 15명가량이 일하고 있다. 인도어팜(실내 농장) 기술로 4억달러(약 5200억원) 규모 중동 수출 계약을 진행 중인 넥스트온은 이곳을 거점으로 접경 국가 쿠웨이트에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하루 700㎏ 규모의 딸기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BIBAN에서 열린 IR(기업설명) 대회 우승 업체 엔젤스윙도 GBC를 둥지 삼아 건설현장 드론 실증을 진행 중이다.

GBC 설립과 함께 논의된 양국의 공동 펀드는 1억6000만달러(약 2073억원) 규모로 조성되고 있다. 사우디벤처투자(SVC), 사우디 국부펀드(PIF Jada) 등이 출자하는 이 펀드는 한국 기업에 의무적으로 투자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시장의 기대감이 크다. 중동 진출의 또 다른 축인 UAE의 장관급 인사들은 이달 초 국내 최대 스타트업 축제 ‘컴업’에 참석했다. UAE 현지 투자 행사인 ‘인베스토피아’에서 교류하기 위한 만남이었다. 서울시는 지난 10일 두바이 국제금융센터(DIFC)와 자유로운 국제 송금이 가능한 스타트업의 현지 법인 설립 등을 지원하기로 했다.

“중동 진출 원스톱 지원창구 필요”

창업가들 사이에서 UAE는 영국에, 사우디는 중국에 비유된다. UAE는 해외 창업가 유치 절차가 잘 갖춰져 있고, ‘콜드 메일(cold mail)’ 답변을 받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평가다. 상대적으로 사우디는 특히 소통이 어려운 국가로 꼽힌다. 현지에 진출한 스타트업의 C레벨 관계자는 “사우디는 중국보다 ‘관시’(인맥 관계)가 심하고 단일 왕정 국가라 주요 의사결정에서 왕족들과 안면을 틀 필요도 있다”며 “정부의 교류 프로그램이 단순히 보여주기식 사진 촬영에만 그치지 않고 기업 규모, 성장 단계별 네트워킹 장을 마련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지 체류에 필요한 정보가 구체적으로 제공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표적인 내용이 비자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UAE에 10년을 체류할 수 있는 ‘골든 비자’가 인기인데, 요건을 알아보려 해도 정보를 제대로 아는 한국 공무원들이 없어 고생했다”며 “발급이 까다로운 사우디 ‘이까마’(거주증)를 포함해 민간에서 요청하는 중동 진출 정보를 처리할 ‘원스톱 창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 육성 필요성도 대두되고 있다. 유태양 중동 전문 컨설턴트는 “중동 전문가의 국내 인력풀은 이슬람 정치와 문화 전문가가 많았는데 경제·산업 중심으로 재편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스타트업의 물음에 답해줄 현지 비즈니스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정부가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