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공돌이'들은 어떻게 디자이너가 됐을까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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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력의 중요성이 점점 강조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지난 5월 세계경제포럼에서 발표된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 2023'을 살펴보면 앞으로 각광받을 직업을 위한 기술 10가지 중 1위가 바로 ‘창의적인 사고 능력’이었는데요. 김성준 렌딧 대표가 이 시대 '창의력'이란 무엇일지, '디자인 싱킹'의 개념과 뒷이야기를 한경 긱스(Geeks)에 전해왔습니다.
'일자리의 미래 보고서 2023'은 앞으로 모든 직종에서 개인이 보유한 기술의 거의 절반인 44%가 변화해야 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또 앞으로 5년 동안 전 세계 일자리의 약 4분의 1에 가까운 23%가 변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45개 국가에서 6억 7300만 명의 근로자를 기준으로 69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83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고용의 2%인 1400만 개의 일자리가 순감소하는 수치다.
우리는 격변의 시기를 살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바꾸어 놓은 우리의 일상 속에 갑자기 인공지능이라는 미래가 기습처럼 찾아왔다.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회피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선택지가 될 수 없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가장 떠오르고 있는 ‘창의력, 창의성, 창의적인 사고’란 과연 어떤 것일까?
'디자인 싱킹' 뭐길래
“누구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어요. 나도 창의적일 수 있다는 창조적 자신감(Creative Confidence)이 중요합니다!”데이비드 켈리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는 모든 사람은 원래 창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대학교 홈페이지에 있는 켈리 교수의 약력에는 ‘사람들이 창의적인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돕는데 전념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켈리 교수의 창조적 자신감 양성 교육에는 ‘디자인 싱킹’이라는 프로젝트 기반의 방법론이 사용된다. 디자인 싱킹은 사용자의 니즈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문제의식을 도출한 후, 반복적인 프로토 타이핑을 통해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세계적인 디자인 구루이자 디자인 싱킹의 주창자로 불리는 켈리 교수가 사실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카네기멜런 대학에서 전기 공학을 전공한 공학도다. 이후 스탠퍼드대의 기계공학과 산하에 있는 제품 디자인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켈리 교수가 졸업한 스탠퍼드의 제품 디자인 석사 과정은 오랜 기간 동안 ‘조인트 프로그램 인 디자인’이라고 불려 왔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과정이 기계공학과 내에 있지만, 공대생과 미대생을 아울러 교육하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 교육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학제간 교육이란 이렇게 서로 다른 여러 분야의 인재들이 함께 참여하는 교육이라는 의미다.
1970년대 이 과정을 졸업한 켈리 교수는 이후 학교에서 배운 이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철학과 이론을 ‘디자인 싱킹’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해냈다. 2004년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디자인 싱킹’을 교육할 수 있도록 스탠퍼드 대학 내에 ‘하소 플래트너 디자인 연구소(Hasso Plattner Institute of Design)’를 설립했다. 흔히 디스쿨(d.school)로 알려진 교육 기관이다.
필자가 데이비드 켈리 교수와 디자인 싱킹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2003년 여름, KAIST 1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하는 한 세미나에 들어갔는데, 아이디오라는 미국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한국계 디자이너의 발표가 있었다. 그 디자이너의 이름은 김 다니엘. 스탠퍼드대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하고 아이디오에 입사한 최초의 한국계 직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날의 세미나는 이후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거대한 트리거가 됐다. 이날 김 다니엘 디자이너가 발표한 내용이 바로 디자인 싱킹에 대한 것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디자인은 전혀 관심 분야가 아니었다. 1학년 때는 전공을 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생명공학을 전공하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김 다니엘 디자이너의 발표를 들은 나는 곧바로 전공을 완전히 다른 분야인 산업 디자인으로 바꿨고, 그로부터 7년 뒤 스탠퍼드대 기계공학과 제품디자인 석사 과정에 입학해 데이비드 켈리 교수의 제자가 됐다.
"경험을 디자인하라"
나에게 이토록 큰 울림과 영감을 준 디자인 싱킹이란 과연 무엇일까. 최근 김 다니엘 데이라이트 디자인 대표와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해보고자 한다. 필자(이하 SJ) : 정말 2003년에 들은 세미나에서 받았던 거대한 충격은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까지 저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그저 무언가를 예쁘게 그리고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뿐이었거든요. 이제 디자인 싱킹은 제가 모든 면에서 어떤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론이에요. 특히 정량화하기 어려운 주제들, 문제가 정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은 상황들을 풀어낼 때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다니엘이 생각하시는 디자인 싱킹에 대해 들어 보고 싶어요.
김 다니엘 대표(이하 Dan) :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디자인(human-centered design) 방법론이죠. 단순히 제품이나 서비스만을 바라보는 디자인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는 고객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통해 정말 고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해결하자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에요. 결국 디자이너의 측면에서도 우리가 디자인한 이 서비스나 제품이 고객의 삶에 어떻게 접목되고, 어떤 상황에서 이 제품을 떠올리게 되는가, 이러한 총제적인 경험들을 디자인할 수 있어야 비즈니스 경쟁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고요.
SJ : 다니엘도 원래 학부에서부터 디자인을 전공하시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다니엘을 통해 이 과정을 알게 되었지만, 다니엘은 어떻게 제품 디자인 전공을 하게 되신 건가요?
Dan : 사실은 저도 SJ 만큼이나 우연한 계기로 스탠퍼드의 제품 디자인 교육에 대해 알게 됐어요. 역시 대학에 입학할 당시에는 전공을 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같고요. 지금 하고 있는 분야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국제정치학 같은 분야를 해 볼까 생각했던 것도 아주 비슷하네요. 기계공학과 내에 제품 디자인 전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1학년 때 룸메이트 덕분이에요. 전자공학을 전공하던 친구인데, 무슨 수업을 듣는지 ‘탁구 로봇’을 만든다면서 매일 뚝딱 거리고 있는 거예요. 방에서 탁구공이 막 날아다니곤 했었죠. 제가 어릴 때부터 미술과 만들기를 좋아했었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과목이 바로 디자인 싱킹의 기초를 다지는 ME101 수업이었어요. 제 룸메이트는 그 과목이 워낙 인기가 있어서 호기심에 들어봤다고 하더라고요. 저에게는 인생의 대 전환점이 됐죠. 이후에 학부 전공을 기계 공학으로 바꿨고요. 그리고 석사 과정을 제품 디자인 전공으로 하게 된 거죠.
SJ : 스탠퍼드 제품 디자인 전공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다양성’인 것 같아요. 기계공학과 내에 있는 전공이지만, 절반은 미대생 중에서 선발했으니까요. 제가 KAIST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좀 아쉽다고 느꼈던 점이 바로 이런 다양성이었거든요. 그래서 삼성 디자인멤버십 같은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했었어요. 전국의 디자인 전공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저처럼 공대 기반의 디자인 전공자와 섞여져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너지가 컸다고 생각해요.
Dan : 맞아요. 저 역시 그 부분이 마술과 같은 학습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던 요소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스탠퍼드 제품 디자인 석사 과정에는 단 1년이라도 학교를 떠나서 현업에 종사하거나,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해 본 사람이어야만 지원할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제 동기 중에는 실제로 굉장히 신기한 경력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어요. 나이대도 20대에서 40대까지 다양했고요. 20년간 사업을 하다가 돌연 ‘나는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라면서 지원한 친구도 있었고, 월스트리트에서 잘나가는 뱅커로 일하면서도 삶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서 주말마다 목공을 혼자 하다가 입학한 친구도 있었죠. 순수 예술 분야에서 조각을 했던 동기도 있었어요. 이 친구는 자기만족만을 위한 예술 행위보다는 조금 더 세상에 임팩트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입학하게 됐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프로젝트를 해 보면서 정말 많은 배울 점이 있었죠.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궁금증이 많은, 그런데 아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을 때 나오는 그 시너지가 엄청났어요.
SJ : 교육 방식도 참 새로웠어요. 무언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풀어내고 싶은 문제를 도출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굉장히 자유도가 높은 대신 학생에 따라 결과물의 편차가 컸다는 기억도 있어요.
Dan : 맞아요. 특히 졸업 작품 프로젝트를 하는 1년 동안 정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죠. 아무런 지침이나 교과 과정이 없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라’는 건 정말 어려운 과제잖아요? 그런데 돌아보면 그 시간이 정말 좋은 트레이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간 배운 디자인 싱킹 프레임을 기반으로 어떤 목표를 설정했고, 얼마나 집중하고 노력했는가가 결국 작품으로 구현되는 것이니까요. 사실 교수님들이 집중한 것은 결과물 보다 오히려 그 과정인 것이죠.
SJ : 어쩌면 디자인은 혼자만의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협업에 대한 중요성도 늘 강조했던 것 같아요.
Dan : 학교에 다녔던 당시에는 저도 잘 몰랐어요. 무언가 교수님들에게 상담을 하러 가면 늘 ‘So,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na do?’ 같이 역 질문이 돌아오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 문제를 풀려면 A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와 같은 질문에는 늘 답을 해 주셨었어요. 교수님이 아는 사람을 소개해 주거나, B 교수님을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 보라는 식이죠. 결국 나중에 사회에 나와 돌아보니, 그 과정들이 정말 큰 깨달음을 주는 시간이었어요. 커뮤니티 속에서 어떻게 협업을 해 나가야 하는지, 팀으로 일하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여를 해 나가야 하는지 같은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과정이었던 거죠.
SJ : AI 시대가 도래하고 점점 더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잖아요?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도 바뀌어 가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Dan : 현재 제가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은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예 없던 직업들이었어요. 예를 들면 UX 디자인 같은 것들이죠. 마찬가지로 앞으로 AI의 발전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직업들이 생겨날 거라고 생각해요. 돌아보면 제가 스탠퍼드 제품 디자인 전공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웠던 것 2가지는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는 법’과 ‘질문을 잘하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 덕분에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계속 찾아왔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기회들을 잘 모르는 분야라도 ‘한 번 해 보지, 뭐!’ 하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로 도전해 올 수 있었고요.
AI 시대의 디자인 싱킹 분야를 생각해 보면, 다소 낙관적인 견해일 수 있겠지만, 여전히 모든 부분을 AI가 대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관찰하고, 공감하고, 그 속에서 맥락을 파악할 때에 많은 경우 정성적인 관점에서 가설을 만들어내고, 테스트해 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디자인 싱킹의 핵심 역량인데요. 이 과정 속에서 테스트를 반복하거나, 후반부에 결과물을 도출하는 심미적 작업 과정 등에 AI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명확히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본질은 문제를 정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역시 ‘질문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애초에 궁금증이 많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디자인 교육 관점에서 더 많은 논의들이 일어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대담 끝 무엇보다 창의성의 배양이 중요하다는 시대에 ‘모든 사람은 원래 창의적이다.’라는 데이비드 켈리 교수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화두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창의적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할 때다. 지난해 김 다니엘 대표와 데이비드 켈리 교수가 나눈 대담 속의 조언으로 이 글을 마친다.
“학생들이 창조적 자신감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창의적이라는 걸 기억하게 할 만한 장치를 만들면 돼요. 가장 좋은 건 프로젝트를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서, 하나하나 쉽게 성취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걸 몇 번 반복하면, 어느 순간 ‘아, 내가 창의적인 사람이구나’하는 깨달음이 와요.”
김성준 | 렌딧 대표
세 차례의 창업 경험을 가진 연쇄 창업가. 첫 창업은 2009년에 했던 기부의 일상화를 위한 사회적 기업 1/2 프로젝트. 두 번째는 2011년 스탠퍼드대학원 재학 중 창업 수업에서 만난 팀과 함께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했던 스타일세즈(StyleSays)다. 세 번째 창업한 렌딧은 사업 자금 마련을 위해 한국에 돌아와 개인 대출을 해본 경험을 통해, 중금리 대출이 부재하다는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창업한 회사다.
실리콘밸리에서 경험한 창업가 정신과 혁신적인 조직의 기업 문화를 렌딧에 이식하고 적용해 전통적인 금융 인재들과 혁신적인 IT 인재들이 성공적으로 융합한 테크핀(TechFin) 조직으로 성장시켜 나가고 있다.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으며 스탠퍼드대학원 기계과 프로덕트 디자인 석사 전공 도중 자퇴하고 스타일세즈(StyleSays)를 창업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