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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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국이 도입한 에너지 기업 횡재세로 글로벌 석유 메이저의 판도가 재편되고 있다.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과 셸, 프랑스의 토탈 등 유럽 기업은 횡재세로 손발이 묶인 가운데 미국의 엑슨모빌과 셰브런은 올 들어 대규모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다.

15일 석유·가스업계에 따르면 내년 원유시장은 엑슨모빌과 셰브런을 중심으로 재편될 전망이다. 1990년대 후반 엑슨과 모빌의 합병, BP의 아모코 인수 등으로 지금의 구도가 형성된 지 20여 년 만이다. 엑슨모빌은 지난달 미국 셰일가스 기업 파이어니어내추럴리소시스를 595억달러(약 81조원)에 인수했다. 원유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아람코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셰브런 역시 지난달 미국 에너지 기업 헤스코퍼레이션을 530억달러(약 72조원)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인수로 셰브런은 매장량이 110억 배럴 이상으로 추정되는 가이아나 해저 광구의 지분 30%를 확보했다.

반면 유럽 석유기업은 각국의 친환경 정책과 횡재세 부과로 신규 유전 개발과 M&A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9월 ‘연대기여금’이라는 명칭으로 횡재세를 도입했고, 영국은 지난해 에너지이익부담금을 통해 영업이익의 35%를 횡재세로 부과했다. 머레이 오친클로스 BP 임시 최고경영자(CEO)는 3분기 실적 발표에서 “BP는 M&A에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영국이 도입한 횡재세를 포함해 세금으로 약 25억달러를 납부하는 등 재무적 부담이 커진 데다 환경단체와 야당 등이 탄소중립 목표를 들어 회사를 압박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와엘 사완 셸 CEO 역시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대규모 기업 인수 대신 자사주 매입을 늘리고 주주들에게 현금을 배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英 기업 세금 압박 받을 때…美는 신규 유전 개발

유럽 각국이 석유 기업에 고율의 횡재세를 부과했지만 미국은 부과하지 않은 까닭은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의 차이 때문이다. 유럽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가 아니라 화석연료 사용 중단을 목표로 석유산업을 폐기하려는 정책 흐름 속에서 횡재세 등 강력한 규제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차원의 연대기여금 시행 전에 이미 횡재세를 도입한 국가를 포함해 현재까지 유럽에서 에너지 부문 횡재세를 도입한 국가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총 13개국에 달한다.

영국 셸은 강력한 규제 때문에 재투자를 포기하고 배당에 집중하면서 신사업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셸은 3분기 62억달러의 영업이익(조정)을 냈고, 이를 바탕으로 4분기 35억달러 규모의 자사주 매입을 할 예정이다. 셸은 3분기에 3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는 등 올해 주주환원 규모가 230억달러에 달할 전망이다. 셸은 지금도 수익 대부분을 화석연료 사업에서 올리고 있다. 셸은 천연가스 부문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호주 프렐류드 시설 유지보수로 전 분기 대비 생산량이 9% 감소했으나 25억달러의 수익을 냈다. 원유 시추에서도 심해 유전 생산량이 증가하고 유가가 상승하면서 22억달러의 이익을 냈다.

반면 미국 정부와 기업은 미래에도 석유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알래스카 등에서 신규 유전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달 하이탐 알가이스 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은 “2022년 하루 9960만 배럴인 석유 수요가 2045년까지 계속 늘어나 하루 1억1600만 배럴이 될 것”이란 예상치를 공개했다. 비싼 에너지 생산 비용 때문에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생각보다 늦어질 것이란 예상이다. 친환경 대신 값싼 에너지를 원하는 저개발 신흥국의 인구와 경제 성장이 가속화하는 점도 석유 수요 증가 전망의 근거다.

환경단체 등의 예상이 빗나가고 인류의 석유 사용이 계속된다면 유럽이 스스로 수익성 높은 자국 산업을 폐기한 꼴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나이지리아인이 당장 테슬라를 운전하거나 태양전지판으로 집에 전력을 공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유럽 석유 기업의 친환경 에너지사업은 최근 고금리로 잇따라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친환경 설비의 높은 비용 때문에 2020~2021년처럼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해야 간신히 손익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미국 뉴욕주 앞바다에서 해상풍력 발전 사업을 추진하다가 5억4000만달러(약 7250억원)를 날리는 등 큰 손실을 보고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