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옛 통일민주당사는 서부중앙의원으로 바뀌었다가 최근 리모델링으로 예전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왼쪽부터) 옛 통일민주당사는 서부중앙의원으로 바뀌었다가 최근 리모델링으로 예전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내가 제대하고 복학한 해는 유난히도 정치적 사건들이 많았다. 대학 캠퍼스는 말할 것도 없고, 명동성당 주변은 최루가스로 인해 눈을 뜨고 다닐 수가 없었다. 전방 부대에 근무한 나는 목요일이면 정치색 짙은 이념 교육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그래서 제대는 민간인으로의 신분변화와 ‘주입된 이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민주화의 바람 앞에 모든 것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한국은 긴 독재의 터널을 통과해 민주화의 햇살 속으로 진입하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에서 하사교육을 했던 군인정신 투철한 분대장이 민주 열사의 장례 행렬에서 군중을 지휘하고 있었다. 전공을 역사로 택한 나는 캠퍼스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학우들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시위를 하는 것도, 안하는 것도 아니었다. 때는 1987년이다.

우리 역사의 분기점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과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 해방된 1945년, 4.19가 있던 1960년 등이 꼽힌다. 그러나 영화 ‘1987’이 말해주듯 민주화가 정점을 이룬 1987년도 이에 못지않은 중요한 분기점임에 틀림없다.

시작은 1987년 1월 14일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정국은 정초부터 뒤숭숭했다. 코미디언 김형곤은 이를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코미디 소재로 사용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모든 것을 알아버린 사춘기 소녀처럼, 뭔가 어수선하고 들떠 있었다. 학생들의 집회에 넥타이 부대가 합류해 민주화운동은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4월13일, ‘지금의 헌법대로’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안’이 발표됐다. 전방부대까지 정훈장교들이 찾아와 호헌안에 대해 교육했던 기억이 난다.

4월 13일, 김영삼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6월 10일, 민정당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다. 헌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정당의 후보 지명은 ‘다음 대통령은 노태우’라는 것을 공포하는 것이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군 고문 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계획했다. 김영삼, 김대중이 이끄는 민주화 추진협의회에서 민정당의 후보지명일인 6월 10일 맞불작전을 편 것이다.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있었다. 이날 경영학과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있는 우상호 의원, 좌측은 배우 우현, 우측은 배우 안내상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있는 우상호 의원, 좌측은 배우 우현, 우측은 배우 안내상
이한열은 한 달간 혼수상태로 누워있다 7월 5일 사망한다.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6월 29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국민들의 염원인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이른바 6.29 선언이다. 1987년 1월 14일부터 7월 5일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이제 야권은 정당을 중심으로 연말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중림동이 있었다. 이곳에 당시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인 통일민주당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1987년 7월 11일 이한열 사망 몇일 후 통일민주당 현판식이 이곳에서 있었다. 중림동에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많이 쏠린 때가 없었다. 현판식 기념 사진이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표와 김대중 통일민주당 고문이 환하게 웃고 있다. 주변은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의원들이다.
YS·DJ가 동거했던 1987년의 '정치 1번지' 중림동
사진 속 당사 건물이 나에게는 익숙하다. 스트레스로 혈압계가 터질 만큼 혈압이 올라 갈 때 찾던 병원 건물이었다. 서부중앙의원 건물, 퇴직 사우들에게 물어보니 의견이 분분했다. 출근할 때 봤다는 사람도 있고, 처음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내가 입사하기 전에 당사가 있었다. 역시 기록은 기억에 앞선다.

그런데 왜 이곳에 통일민주당사가 들어선 걸까. 당시 통일민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한 김무성 전 의원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YS가 사무실을 사대문 안에 구하라는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물어보니 1억5000만 원 정도 있다고 해서 200평 이상 되는 사무실을 구하러 다니는데, 50평 이상 사무실 얻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지령이 내려졌던 거예요. 창당을 방해하려는 거였죠. 안되겠다 싶어 차라리 빚을 안고 조그마한 빌딩을 사면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서울 서부역 중림시장 언덕배기에 있는 2억원쯤 되는 빌딩을 제 이름으로 샀어요. 사무실 내부시설 다 하고 집기도 다 집어넣고 오픈했는데 경찰, 안기부, 기무사가 다 낌새를 못 챘어요. 그런데 KBS 뉴스에 크게 터진 거예요. 통일민주당이 당사를 중림동에 구했다고요. 그때 나는 속으로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독재정권에서 김무성이가 빌딩을 샀다고 하니까 우리 집은 완전히 망했구나 했는데 다행히 우리 큰형님이 김윤환 전 의원,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경북중학교 동기들이었어요. 그래서 피해를 좀 면했지요. 큰형님이 두 사람한테 '내 동생이 하나 있는데 저놈이 YS한테 미쳐가지고 내 말도 안 듣고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대통령에게 이야기한 모양이더라고요."

통일민주당의 당사 시절은 마포 제일빌딩으로 이사간 1988년 9월까지다. 1년 남짓이지만 이곳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위태로운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해야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이길텐데 그 해 10월 26일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김대중을 따르던 동교동계 의원들은 이곳을 나와 10월 29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12월 16일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돼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은 사그라들었다. 1990년 김영삼은 3당 합당을 선언하고 통일민주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중림동의 유명한 설렁탕집 ‘중림장’은 당시 통일민주당 입주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남산의 안기부에서도 큰 통을 들고와 설렁탕 50인분을 실어갔다고 한다. 설렁탕을 사이에 두고 맛의 탕평(湯平)이 이루어졌다. 올해 초까지 통일민주당 입주 당시 모습 그대로였던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로 외관이 변했다. 종로를 '정치 1번지'라고 하지만 1987년의 정치 1번지는 단연 중림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