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타운이 들어서 있는 상하이 홍신루는 요즘 트렌드에 밝은 중국 청년들의 명소로 불린다. 특히 ‘핫 플레이스’로 꼽히는 곳은 ‘서울 야시장’이다. 총천연색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한글 간판 아래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판 인스타그램인 샤오홍슈에 올릴 ‘인증샷’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야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한국식 포장마차가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퇴근길에 삼삼오오 모여 불판에 고기를 굽기도 하고, 상하이 인근 항저우나 쑤저우에서 고속철을 타고 상하이 밤 문화를 즐기러 온 관광객도 상당수다. 이곳에서 한국인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야 할 정도로 어렵다. 코로나, 불황, 넷플릭스가 가져 온 상하이의 한류상하이에 서울 야시장 간판이 올라간 건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작년 초였다. 약 두 달간의 상하이 봉쇄령이 해제된 이후다. 내수를 살리는데 사활을 건 상하이 정부는 시민들이 지갑을 열 만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홍신루였다.때마침 넷플릭스를 타고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넷플릭스 시청을 금지했지만, 상하이 시민 대부분이 VPN을 설치해 한국 드라마를 시청했다. 정부 관료들과 대화할 때도 한국 콘텐츠로 ‘스몰 토킹’을 할 정도다. 상하이 정부가 ‘서울 야시장’이란 간판을 올린 배경이다.코로나 이전까지 중국엔 혐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글로벌 시민이라고 자부하는 상하이 사람들도 한국 화장품 대신에 글로벌 명품이나 자국 상품으로 갈아탔다. 기자가 상하이를 방문한 9월경, 이 같은 흐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한인 청년 사업가가 만든 ‘제주 이자카야’라는 이름의 한국식 오마카세 전문점은 3개월 예약이 끝났을 정도로 인기다. 난징둥루 보행로에 있는 상하이 최대 아동복 전문 쇼핑몰에선 이랜드가 운영하는 뉴발란스 키즈가 전체 1등을 달리고 있다. 서울의 종로쯤 되는 상하이의 구도심(화이하이중루)에 있는 젠틀몬스터의 플래그십 스토어는 평일에도 ‘핫 피플’들로 북적인다. 3570조 규모 장강삼각주의 중심인 상하이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나 먼저 방한 의지를 시사한 것은 상하이 소비 시장의 변화와도 연결돼 있다. 상하이에 주재하는 한국 기업 법인장들은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이전과 달리 대중을 동원한 여론전을 펼치지 않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게다가 상하이는 2036년 올림픽 개최지를 노리고 있다. 코로나 봉쇄로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외국인의 투자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상하이 주재 한국법인 관계자는 “예전엔 상하이시가 푸둥을 중심으로 글로벌 금융 허브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요즘은 IT 스타트업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선전시를 경쟁 상대로 생각할 정도로 스타트업 유치에도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상하이 경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 중국 경제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장수, 절강, 안휘성 내 27개 중점 도시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장강삼각주 일체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중국 GDP의 약 4분의1 규모(약 3570조원)에 달하는 거대 경제권이다. 면적으로도 한국의 2.2배에 달한다. 글로벌 명품처럼 고급화로 승부해야1800년대까지만 해도 와이탄의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상하이는 불과 150년 여 만에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로 성장했다. 중국 정부는 모든 지방 정부에 '상하이처럼'을 외친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가장 많이 견학하는 곳이 상하이다. 이런 위상을 갖는 상하이에 한류가 불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상하이에서 K브랜드의 입지는 매우 좁다. 한때 상하이에만 수십 개의 할인점을 열며 월마트, 까르푸 등과 경쟁했던 이마트 상하이 법인은 한국으로 보낼 중국 상품의 소싱 업무만 하고 있다. CJ제일제당, 농심, 풀무원, 청정원이 만두, 두부, 라면, 파스타 밀키트 등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닥 대비 성장률이 높을 뿐이다.중국 정부에 뒤통수를 맞은 롯데그룹은 ‘중국 쪽으로는 쳐다도 안 본다’라는 말을 할 정도다. K화장품의 쇠락은 더욱 극적이다. 상하이의 즐비한 쇼핑몰 1층은 블랙핑크와 뉴진스 멤버를 모델로 삼은 광고로 도배했지만,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화장품 브랜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물은 이제 막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띄울 배도 없고 선뜻 나서는 사공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14억명에 달하는 거대 소비 시장을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우리 기업의 딜레마다. 한가지 해답은 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처럼 고급화 전략이 아니면 중국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설픈 브랜딩 전략으로는 중국의 애국주의 소비 물결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중국 상하이 탐방은 오랜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상하이를 방문한 마지막 해가 2009년이었다. ‘상하이 엑스포 2010’ 개최를 앞두고 푸둥에 흙먼지가 풀풀 날리던 시절이다. 그 사이 중국은 눈부신 속도로 성장했다. 상하이는 인구 3000만명의 메트로폴리탄으로 변했다.중국몽(夢)을 실현하겠다며 세계를 향해 으름장을 놓을 정도로 급성장한 중국의 변화를 그동안 풍월로만 들었다. 변화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코로나19가 지나가고, 중국 정부가 유커를 해외로 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바로 결심했다. ‘지금이 가야 할 때다’. 여름의 끝이 보이던 9월의 어느 날 3일간의 짧은 여정을 잡고 홀로 상하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금없는 사회의 완전한 실현가장 궁금했던 건 중국의 ‘디지털 세상’이었다. ‘중국에선 거지도 위챗페이로 동냥한다’는 말을 뉴스로 접했을 때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당시 생각은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나 그렇겠지’였다.상하이에서 거지를 볼 수 없어 동냥 운운하는 얘기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모든 금융 결제는 휴대폰에 탑재된 페이 애플리케이션(앱)으로만 이뤄지고 있었다. 면세점에서 관광객을 위해 일부 신용카드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내국인들은 휴대폰 없이 외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그렇다면 중국의 변방에서도 이 같은 디지털 경제가 작동하고 있을까. 답은 ‘그렇다’였다. 필자처럼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중국 사람들이 드는 사례가 있다. 중국 남부 윈난성 린창(臨滄)이라는 변방에 아직 원시 부족 생활을 하는 소수 민족인 와족의 얘기다.와족은 사람의 머리를 베어 긴 죽창에 꿰어 놓는 엽두 문화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부족이다. 지금은 와족의 노인들도 휴대폰을 쓰고, 꼭 필요한 공산품을 디지털 화폐로 결제해서 구매한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중국 정부가 2011년부터 시작한 탈빈곤 정책이다. 8000만명 공무원을 탈빈곤에 투입한 시진핑중국 공산당은 약 8000만명의 공무원을 중국 전역의 빈곤 지역에 급파해 소수민족에게까지 휴대폰을 지급했다. 통신비는 무료다. 정부는 탈빈곤을 위한 각종 보조금을 디지털 화폐로 지급했다. 까막눈이건 디지털 문맹이건 정부 돈을 받으려면 휴대폰을 쓸 줄 알아야 했다.중국 공산당은 왜 디지털 경제의 구현에 이토록 목을 매는 것일까. 상하이에서 만난 이들의 답은 다양했다. 대부분은 완벽한 디지털 화폐의 구현이 최종 목적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달러 패권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다. 위안화 결제를 받아들일 후보국들은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다. 이들은 현금, 신용카드를 넘어 곧바로 휴대폰 결제로 직행하고 있다.하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달러 패권에 맞서려고 리창의 와족에게까지 보조금을 디지털 화폐로 지급하나? 어쩌면 위안화 패권에 대한 열망은 본(本)이 아니고, 말(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중국 대륙은 수많은 왕조의 명멸을 지켜봤다. 흥했던 왕조도 반드시 망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청(淸)조차 300년을 못 넘겼다. 역대 왕조가 말년에 겪었던 공통된 두 가지 고질병이 있다. 부패와 농민 반란이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팔고, 백성에게 가야 할 세금이 중간에 새는 등 부패가 심해지면 어김없이 지방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의 국가 시스템은 AI(인공지능)와 빅데이터를 무기로 변방 끝 촌락에까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거대 행정 국가다. 동시에 공산당 1당 지배만 허용된다는 점에서 중국의 옛 왕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적 편견이 들어간 표현이긴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핵심 가문은 ‘홍색 귀족’이라 불린다. 신하방 정책의 진짜 목적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겪으면서 시진핑 정권은 농촌에 대한 관리에 정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신(新)하방’ 운동은 시진핑 주석이 무엇을 중시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도시 실업률 해소와 농촌 현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효를 거두기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상 개조 운동에 가깝다. ‘공산당은 농촌과 농민을 중시한다’는 시그널 말이다.디지털 화폐야말로 부유층의 부패와 경제적 양극화를 동시에 해소할 수 있는 보검이다. 누구든 디지털 숫자로만 거래하는 세상에서 숨길 수 있는 돈이란 없다. 정부는 중간의 각종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중국 변방 구석구석에까지 신민의 지갑에 보조금을 쏴줄 수 있다. 중국 내부에선 이런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 주석에 대한 농민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다’. 마오쩌둥이 국면 전환을 위해 즐겨 썼던 전술이다.워싱턴은 한때 중국이 글로벌 자본주의 질서 속에 온전히 편입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월가의 천문학적인 자금이 중국 유망 기업들을 뉴욕에 상장시키는 데 투입됐다. 하지만 중국은 워싱턴의 그물에 들어가길 거부했다.중국에 대한 오판이란 측면에선 한국도 자유롭지 못하다. 진보를 주창하던 정부는 시진핑의 중국이 ‘사회주의적 자본주의’라는 모순을 이겨낼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중국은 혐한(嫌韓)으로 화답했다. 문제는 현재의 중국을 또다시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치(內治)에 관한 한 중국은 여전히 견고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