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소년의집 설립, 아이들 배움 위해 학교 설립하기도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27) 소 알로이시오 신부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거리마다 넘쳐나는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어주고 돌보아 준 '푸른 눈'의 신부가 있다.

바로 알로이시오 슈월스 신부다.

30일 부산시 등에 따르면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알로이시오 슈월스는 1957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해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한국을 찾아 부산교구 소속의 신부가 됐다.

14살 때부터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제가 되고 싶다'던 알로이시오 신부는 꿈을 좇아 이런 선택을 했다.

그는 진짜 한국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자신의 성을 소(蘇)씨로, 이름을 재건(再建)으로 정했다.

사람들은 그를 소 알로이시오 신부라고 불렀다.

그는 1966년 부산 서구 아미동과 감천동 경계에 있는 사유지를 사서 무료 진료소를 세우고 환자들을 돌보는 사업을 했다.

의사 1명과 간호사 2명을 고용해 가난한 이들을 돌봤는데, 매일 150∼200명의 환자가 몰려들자 알로이시오 신부는 이듬해인 1967년 암남동과 보수동에도 또 다른 진료소를 세우고 결핵 요양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69년에는 고아들을 위한 '소년의 집'을 설립해 아이들을 돌봤다.

그는 '영화숙'이라는 시설에서 아이들이 학대나 영양실조, 질병, 폭력 등으로 죽어 나가는 것을 알게 되자 불법 사실들을 수집해 보고서를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

그는 자신이 만든 보고서를 당시 대통령실과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 등에 보내며 지역사회를 발칵 뒤집었고, 학대받던 아이들 301명을 데려와 '소년의 집'을 최초로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외부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자, 아이들을 위한 정규 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27) 소 알로이시오 신부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멸시당하고 차별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는 1973년 알로이시오 초등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 나중에는 전문대학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는 부모·형제가 없는 아이가 훗날 성인이 되어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으려면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교사들에게 '학생들 수준에 맞는 수업을 준비할 것' '교안 없이 빈손으로 들어가지 말 것' '아버지가 없는 학생들에게 아버지의 모델이 되어줄 것' '학생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차별하지 말 것' 등을 강조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한국 경제가 성장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더욱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찾아 필리핀(1985년)과 멕시코(1990년)로 떠났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89년 10월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뒤 1992년 3월 1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선종했다.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장은 "알로이시오 신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인 '오마이 파파'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평생을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신부로 사셨다"면서 "한국전쟁 이후 부산이 기억해야 할 외국인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