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부동산 경기 악화로 현지 철강사들이 자국에서 남아도는 철강재를 해외로 밀어내고 있다. 여기다 엔저(低)로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 철강업체까지 ‘덤핑 공세’에 나섰다. 포스코 등 한국 철강사들이 ‘중국에 밀리고, 일본에 치이는’ 형국에 내몰렸다. 업계에선 일본 기업들의 의도적 ‘가격 후려치기’는 불공정 무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반덤핑 제소 등 강경 대응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日, 싸게 팔아도 손해 안 봐

일본의 열연강판 ‘덤핑 공세’에 포스코 등 국내 철강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포스코 전남 광양제철소 창고에 열연강판이 쌓여 있다. /포스코 제공
일본의 열연강판 ‘덤핑 공세’에 포스코 등 국내 철강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포스코 전남 광양제철소 창고에 열연강판이 쌓여 있다. /포스코 제공
20일 업계에 따르면 지난 1~8월 국내에서 쓰인 열연강판 중 일본산 비중은 23%다. 2021년 15%, 2022년 17%에 이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2017년(25%) 후 6년 만에 가장 높다. 업계에서는 올해 일본 열연강판 총수입량이 240만t으로 지난해(166만8000t)보다 44%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본제철, JFE스틸, 고베제강 등이 엔저 효과를 등에 업고 한국에 열연강판을 현지 판매가격보다 15% 저렴하게 잇따라 수출하고 있어서다. 일본산 제품이 늘면서 전체 열연강판 가운데 외국산 비율도 올 들어 40%로, 지난해(31%)보다 높아졌다.

일본 철강사는 싸게 수출해도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할 수 있다. 자국 유통 물량을 해외에 내다팔 수 있어 도요타 등과의 가격 협상에서 유리해진다는 점을 노린 행보로 분석된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사장이 지난 2월 “내수시장에서 철강재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공언한 배경이다.

포스코 영업 현장엔 비상이 걸렸다. 국내 고객사들이 저가 철강재의 대명사로 통하는 중국산보다 저렴하면서 품질이 좋은 일본 철강재로 서서히 눈을 돌리면서다. 포스코 관계자는 “열연강판을 받아 다른 철강재로 가공하는 중소 철강기업이나 중견 가전업체로부터 일본산만큼 판매가격을 낮춰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열연강판을 수입하면 통상 3개월이 걸린다. 포스코에서 구매하면 1~2개월 내 조달할 수 있다. 최근엔 늦더라도 저렴한 철강재를 쓰겠다는 업체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韓 철강재 동남아 점유율도 하락

열연강판을 제조하지 않는 동국제강, 대한제강 등은 일본산 철근 유통량을 모니터링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대제철도 자사 열연강판을 대부분 자동차 강판용으로 자체 소비하는 터라 직접 피해를 보진 않지만 철근 시장 추이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부동산 경기 악화로 철근 가격이 많이 떨어져 유통상들이 재고를 쌓아두고 있어 피해는 아직 없다”면서도 “중소 건설사들은 줄어든 마진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산으로 갈아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3국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동남아시아 시장에도 ‘엔저’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한국 철강재는 올 1~8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에 306만9000t 수출돼 점유율 16.9%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325만7000t(점유율 18.6%)보다 줄었다. 일본 철강재가 한국 물량의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성장성이 높은 동남아 시장은 한국 철강재 수출의 약 13%를 차지한다.

철강은 주요 제조업 가운데 한국과 일본 기업이 수출 경합을 치열하게 벌이는 품목이다. 일본 기업 대비 기술 수준, 시장지배력, 가격 차별화 요인이 크지 않아 수출 시장에서 경쟁 강도가 높다. 철강재는 다른 산업군과 달리 대체가 쉬운 기초 소재라는 점도 한국과 일본이 직접적으로 경쟁하게 된 요인으로 꼽힌다.

김형규 기자 k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