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박수, 치지 마세요
짜자자잔~. 끝 음이 울려 퍼지고, 청중은 ‘와아~’ 하는 환호성과 함께 무대를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일반인들이 흔히 떠올리는 클래식 음악회 장면이다. 이런 상식적 이미지가 클래식 마니아들을 괴롭게 한다. 나오지 말아야 할 때 박수가 터져나와 음악을 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박수가 나오지 말아야 할 순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제일 중요한 원칙은,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박수를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음악일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은 ‘소리가 이어지는 데까지’일 것이다.

그런데 악기의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길게 이어진다. 여운이 공기 중에 퍼져나가면서 몇 초간 지속된다. 피아노의 경우 소리가 안 나는 것 같아도 건반이나 페달을 누르고 있는 한 진동이 이어진다. 그 번짐과 여운도 음악이다. 소리가 더 이상 안 들리는 것 같더라도 박수를 섣불리 치면 안 되는 이유다.

죽음을 상징하는 결말을 지닌 곡들도 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스토리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과 말러의 교향곡 9번 엔딩은 작곡가 자신의 죽음과 연관돼 있다.

이런 곡들은 소리의 여운이 완전히 끝난 뒤에도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한참 침묵을 이어간다. 악기에 올린 손과 지휘하던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끝낼 때는 조명을 어둡게 낮추기도 한다. 침묵의 음악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연출이다. 이런 침묵을 함께하는 체험은 예술을 넘어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감동을 준다.

그런 감동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 ‘때 이른 박수’다. 아직 지휘자와 연주자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는데 박수를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뜻있는 청중은 이런 경우를 ‘안다 박수’라고 부르며 비판한다. ‘나 이거 어디서 끝나는지 알아!’라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면 애호가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런 순간에 박수를 쳐서 수많은 다른 사람의 감동을 박살 내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바흐의 마태수난곡 마지막 합창이 끝나는 순간 어떤 청중이 “브라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박수를 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기겁한 일이 있었다. 브라보라니, 예수가 잘 죽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지난 14일 서울시향의 차이콥스키 6번 교향곡 비창 연주에서도 마지막 침묵을 끊고 ‘브라보’와 박수가 터진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이럴 때 무대 위 음악가들의 표정을 본 적이 있는가. 허망함, 씁쓸함…. 그 표정을 봤다면 다시는 그런 박수를 칠 수 없다.

어떻게 막아야 할까. 학교에서 배우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니, 연주장에서라도 적극적으로 안내해주면 좋겠다. 안내를 안 하는 건 아니다. 너무 예의를 차리니 메시지 전달이 정확하게 안 되는 게 문제다. “악장 간에는 박수를 치지 마시고, 연주가 끝난 뒤에 힘찬 박수로 연주자들을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안내방송을 하면, 정작 박수를 참아야 할 사람들은 ‘힘찬 박수’만 기억하고 연주가 끝났구나 싶으면, 고민 없이 힘차게 박수를 친다. 그런 박수는 쉽게 전염된다.

그러니, 명확한 금지문으로 안내해주면 좋겠다. 소리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침묵도 음악의 일부라고, 그 침묵까지 끝나기 전에는 박수를 치지 마시라고. 곡이 끝날 때쯤 무대 뒷벽에 영사기로 “아직 박수 치면 안 됩니다”라고 ‘스톱 사인’을 쏴주던가.

아르떼 칼럼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