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국민 눈높이 vs 국민적 수용성
문재인 정부처럼 국민 눈높이란 표현을 즐겨 쓴 정권도 없다. 적폐 청산을 외칠 때는 “기존 제도와 정책이 국민 눈높이에 못 미쳤다”고 했다가, 피감기관 건물 입주 의혹 등으로 비난받던 유은혜 교육부 장관 임명을 강행할 때는 “국민 눈높이에 비춰 결정적 하자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 눈높이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전가의 보도였다.

문 정부는 2018년 12월 국민연금 개혁을 거부하면서도 국민 눈높이를 들먹여 이 표현을 비겁한 정치 언어의 클리셰로 만들었다. 당시 국민연금제도발전위가 내놓은 4개 안이 개혁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의 미봉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료율 인상이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며 걷어찼다. 갈등을 일으킬 사안에는 일절 손대지 않겠다는 인기 영합주의의 전형이다. 문 정권은 국민연금 재정추계도 하지 않고 4대 직역연금을 포함해 어떤 연금도 손보지 않은 역대 유일한 정부다.

윤석열 정부 연금 개혁 시안이 나왔다. 보험료를 더 내고 받는 시기는 늦춰 현재 2055년으로 예상되는 연금 고갈 시기를 최장 2093년까지 연장하는 시나리오다. “국민연금에 가입한 현재 18세 청년이 평균 수명이 될 때까지 연금이 소진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청년들이 안심하고 연금에 가입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국민연금 개혁 정신에 나름 부합하는 안이다. 그런데 주무 부처 수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의 반응이 묘하다. 조규홍 장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수리적·논리적 합리성보다 더 중요한 게 국민적 수용성”이라고 했다. 시안에서 빠진 소득대체율 인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장기 재정에 미칠 악영향은 명약관화하다.

국민 눈높이와 국민적 수용성은 결국 두 가지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국민의 인식 수준을 끌어올리려 하기보다 국민 눈치부터 보려는 갈등 회피적 태도다. 다른 하나는 기득권층만 의식한 나머지 청년·미래세대에 대한 배려가 결여돼 있다. 국민연금 개혁의 제일 원칙은 다음 세대도 향유할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민적 거센 저항에도 연금 개혁을 밀어붙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말이다. “개혁은 사치도 아니고 재미를 위한 것도 아니다. 국가를 위한 필수적 선택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