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 나오는 드라마 보면 일상생활 만족도가 오른다는데

[arte] 김민정의 내 서랍 속 드라마
당도 100%의 로맨스 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

논문이라고 하면 굉장히 딱딱하고 따분할 것 같지만 간혹 재미있는 연구도 있다. 문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 중인 나는, 그런 진흙 속 흥미로운 진주를 찾는 데 늘 진심이다. 뻑뻑한 건빵 봉지에서 달콤한 별사탕을 골라 먹는 맛이랄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는데도 입안이 촉촉해지는 기분이다.

｢로맨스 드라마 시청이 결혼에 대한 환상에 미치는 영향｣.

논문을 읽지 않았는데도 뭔가 내용을 다 알 것 같은 느낌. 제목부터 웃음이 나온다. 2015년 중국 미혼 대학생 대상으로 한국 로맨스 드라마 시청 영향을 살펴보기 위한 연구라는데, 그 결과가 우리의 예상과 사뭇 달라 더욱 웃음이 난다.

429명의 설문조사 통계에 따르면, 신데렐라형 로맨스를 다룬 한국 드라마를 많이 시청할수록 일상생활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스토리 때문에 사회 비교가 일어나 불만족이 많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 반대라는 것이다. 대리만족 및 연애 학습 심리가 작용한 덕분이란다. 오호. 유레카.

사진 = tvN

이제 더 이상 훈남 재벌 3세가 나와 극강의 자본주의적 매력발산을 하는 ‘신자유주의식’ 로맨스물을 숨어서 볼 필요가 없다. 이제 더 이상 남자 셋이 한 여자에게 애걸복걸하며 사랑 공세를 퍼붓는 ‘다다익선식’ 로맨스를 좋아한다고 창피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지금 로맨스 드라마를 보며 ‘일상생활 만족도’를 높여 희망찬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이다. 절대 인생 낭비 시간 낭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는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라 봐야 해서 보는 것이다.

매년 수십에서 수백 편의 국내외 드라마를 섭렵하는 성실한 드라마평론가인 나는 안타깝게도 웬만한 로맨스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재벌 3세의 물량 공세에도 심드렁하고 사각 관계의 한가운데에서 누리는 사랑의 풍요로움도 성에 차질 않는다. 최소한 구미호 정도는 되어야, 자기 목숨을 걸고 하는, ‘벼랑 끝 사랑’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만족도’가 높아진다.

사진 = tvN

당도 100%의 로맨스 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2021)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구미호 설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구미호와 인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기를 흡수해야 하는 구미호.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하기 위해 인간이 되고 싶지만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연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어야 하는 구미호. 그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바로 <간 떨어지는 구미호> 속 남자 구미호 ‘신우여’다.

배우 장기용이 연기하는 남자 구미호 신우여는 보고만 있어도 ‘일상생활 만족도’가 높아진다. “같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너무 재밌다. 얼굴이 잘생겨서.”라고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캐릭터 소개에도 적혀 있다. 가만히 있어도 그럴진대 자기 목숨까지 걸고 순정한 사랑을 하니, 이보다 만족도 높은 로맨스 드라마를 찾기란 쉽지 않다. 비극적 결말이 정해진 가혹한 운명 앞에서 신우여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애틋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마치 호랑이는 죽어서 명품 가죽을 남기고, 여우는 죽어서 명품 사랑을 남긴다는 듯이.

“같이 해보고 싶어요. 그런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죽음을 앞둔 신우여가 원한 것은 얼굴 천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화보에 들어갈 마지막 딥키스가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렇고 그런 그 모든 것이 아니다. <간 떨어지는 동거>를 보다 보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나의 평범한 연애와 평범한 일상이 하늘이 허락한 특권이고 축복이란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주 잊곤 하는 삶의 아이러니, 삶의 오묘한 진실이란 걸 말이다. 평범함의 특권. 비록 우리에게는 목숨을 건 운명적 사랑도, 나만을 애타게 갈구하는 섹시한 장기용도 없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생활은 ‘두 눈 부릅뜨고’ 살아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사진 = tvN

자, 특별한 평범함을 온몸으로 만끽해보자. 두 눈을 감고, 나의 호흡에 집중하자. 들숨과 날숨 사이사이, 해가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별이 뜨고 지고, 그렇게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일상의 감각을 느껴보자. 간담을 서늘케 하는 잔혹한 사건·사고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것, 내가 숨을 쉰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다. 평범해서 너무나 특별한 그대에게, 평범해서 너무나 소중한 그대의 삶에게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