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국제기구까지 연금개혁 촉구하는 '초고령 한국'
추억의 납량특집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온 일화다. 한 마을에 유난히 장수 노인들이 넘치자 주민들은 어르신 부양에 힘겨워한다. 그러다 커다란 구기자나무 뿌리에 닿은 우물물을 마시는 게 장수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민들은 결국 나무를 베어 버리고, 고령자들은 하나둘씩 죽어 나간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한 노인이 주민들에게 “자네들은 안 늙을 텐가”라고 일갈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옛날 드라마에 나온 것과 같은 고령사회에서의 노인 부양 문제가 얼마 전 외신에서 정책 이슈로 소개됐다. 방콕포스트 등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지난 12일 국가 재정 문제를 이유로 노인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던 복지수당을 폐지했다. 기존에는 지방자치단체가 60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연령별로 매월 600∼1000밧(약 2만3000∼3만8000원)을 지급했다. 태국 정부는 이를 소득이 없거나 생활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한 노인에게만 주도록 규정을 바꿨다. 보편적 노인 복지수당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2025년부터 매년 1000억밧(약 3조8000억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는 재정 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태국 정부는 노인층의 반발이 일자 “가능한 한 현명하게 예산을 사용해 모든 연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토요칼럼] 국제기구까지 연금개혁 촉구하는 '초고령 한국'
한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9월 ‘2022 한국경제보고서’에서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재정 악화를 경고했다. 연금 및 의료 지출 증가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060년 1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면서 연금개혁을 통해 이 비율을 60% 수준으로 낮출 것을 권고했다.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현행 62세에서 2034년까지 68세로 늦추고,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인정액 하위 70%에 주는 기초연금 수혜 대상은 줄이라는 제언이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났지만 OECD의 권고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한 모습이다.

보건복지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지난 18일 최종 회의에서 국민연금 보험료를 인상하고 연금 수급 연령을 늦추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험료율을 얼마나 올릴지, 수급 연령을 몇 세까지 늦출지에 대해선 단일안이나 선호안을 제시하지 않았다.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는 선정기준액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2008년 기초노령연금으로 처음 시행됐을 당시 선정기준액은 월 소득인정액 40만원(노인 단독가구 기준)이었지만 현재는 다섯 배가 넘는 월 202만원이다. 최옥금 국민연금연구원 선임연구위원에 따르면 각종 공제를 감안할 때 혼자 사는 노인이 매달 최대 397만원을 벌어도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소득 하위 70% 노인까지 기초연금을 탈 수 있도록 선정기준액을 해마다 상향 조정했기 때문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22조5000억원인 기초연금 지급 총액은 고령화에 따라 2030년 37조원, 2040년 73조원, 2050년 120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대로라면 재정 파탄이 우려되는 상황인데도 정부나 정치권 어느 곳에서도 총대를 메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자문기구 내에서조차 겉돌고 있고, 국회에는 오히려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는 법안이 의원 입법으로 계류돼 있다.

이런 사이에 세대 간 갈등만 심화하고 있다. 엠브레인이 지난 4월 19∼38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저출산·고령화 심화로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젊은 세대의 고령 인구 부담 등 세대 갈등 증대’를 꼽은 응답이 50.3%로 1위였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인사는 노인 폄하 발언을 뱉어내며 오히려 세대 간 갈등을 조장했다.

정치란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게 정치학의 일반적인 정의다. 현재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전례를 찾기 힘든 급속한 고령화를 두고 정치가 실종된 상태다. 정답이 무엇이든 간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추진한 프랑스는 물론 태국에도 정치는 있다. 고령사회에서 한정된 재정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하루빨리 국가적 차원의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젊은 세대가 구기자나무를 베러 다니는 사회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