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도 줄거리도 없는데 빛·소리만으로 강렬하다
줄거리도, 제대로 된 대사도 없는 연극이 있다. 연극 ‘혁명의 춤’은 정체 모를 불빛과 소리의 조각이 반복되는 게 전부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얼마 전 서울 한남동 더줌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이 연극은 미국 실험극의 대가 마이클 커비의 희곡이 바탕으로, 그의 뉴욕대 제자인 김우옥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89)이 번역과 연출을 맡았다.

커비는 1970~1980년대 미국 뉴욕 실험극을 이끈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스토리 대신 구조를 통해 연극의 본질과 기능을 강조하는 ‘구조주의 연극’을 만들었다.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반복되는 대사와 소리, 움직임 등 구조가 전면에 드러나는 연극이다. 김 전 원장은 지난해 커비의 또 다른 연극 ‘겹괴기담’을 23년 만에 연출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2022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뽑히기도 했다.

‘혁명의 춤’도 일반적인 연극과 달리 이야기와 서사가 없다. 서로 내용이 이어지지 않고 독립된 8개의 짧은 장면으로 구성돼 있다. 공연이 시작되면 암전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펼쳐진다. 배우들이 손전등 불빛을 간헐적으로 비추며 무대 가운데로 등장한다.

공연 내내 출처를 알 수 없는 이국적인 노래와 총소리 비슷한 정체 모를 소리가 짧게 들렸다가 사라진다. 손가락 퉁기는 소리, 기침 소리, 발 구르는 소리 등 일상적 소리가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손을 내미는 동작, 물체를 던지는 동작 등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대사도 거의 없다. ‘그들 거야’ ‘들려’ ‘기다려’ 등 단어 몇 개 정도의 대사가 있을 뿐이다.

관객의 상상력이 중요한 작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은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 사이에서 일정한 패턴과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다. 깃발을 흔들거나 비밀스러운 곳에 잠입하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혁명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란 걸 알아차리는 식이다. 다만 그 혁명이 어떤 혁명인지, 어느 나라의 혁명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무대의 모든 요소가 존재감이 뚜렷하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배우 13명은 표정과 몸짓만으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전화기, 사진기, 우산, 채찍, 깃발, 총 등 다양한 오브제(상징적 소품)도 활용된다. 관객들이 무대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는 구조로 공연 중간중간 빛이 비칠 때마다 다른 관객의 표정과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김 전 원장은 1970~1980년대 미국의 실험극을 국내에 거의 처음 들여왔다. 이 작품도 앞서 1981년에 공연한 적이 있다. 당시 낯선 형식에 당혹해하는 관객이 많았다고 한다. 이번 개막일 공연장 로비에서 만난 김 전 원장은 “과거에는 낯설어하는 관객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험극을 공연 자체로 즐기고 재밌어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 연극은 연극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일종의 문학처럼 어떤 줄거리나 메시지를 찾지 않아도 된다. 종합적인 공연 예술로서의 연극, 독특하고 새로움을 경험하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한다. 공연은 오는 8월 27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