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가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최형창 기자
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가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최형창 기자
“정말 이대로 가면 다 죽습니다.”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만난 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는 국내 화장지 원단(원지)제조 업계가 고사 위기에 몰렸다고 하소연했다. 지난해까지만해도 명절을 제외하고 휴일 없이 매일 24시간 공장을 돌렸던 대왕페이퍼는 올해 들어 한 달에 열흘은 쉬고 있다. 신창제지와 대원제지 등 다른 중소 화장지 원단 제조사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저가의 동남아시아산, 중국산이 ‘반제품’ 형태로 국내에 들어오면서 국내 화장지 가공업체들이 국산 원단을 받는 횟수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국산·외산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인 비밀

국내 화장지 업계는 크게 원단 제조사와 가공 업체로 나뉜다. 펄프를 직접 들여와 화장지 원단을 만드는 기업은 국내 11개사 뿐이다. 하지만 가공 업체는 원단을 어디서든 받은 뒤 규격에 맞게 자르고 지관을 넣어 완제품을 생산하는 비교적 쉬운 공정이어서 국내 200여개 회사가 난립해 있다.

문제는 인도네시아산과 중국산 원단이 국내에 들어와 가공 과정만 한 번 거친 뒤 ‘국산’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장지는 대형 유통사 자체브랜드(PB)로 팔리고 있다. 예를들어 A사이트에서 화장지 최대판매 상품은 글로벌 제지기업인 인도네시아 기업 APP가 생산한 원단을 쓴다. APP 한국법인인 GUTK가 수입해 국내 가공업체인 모나리자SM에 맡겨 A사 이름을 달고 판매중이다.

국산·외산 원단으로 만든 화장지가 모두 ‘대한민국산’으로 팔리는 배경엔 부실한 원산지 표기법 탓이다. 국내 화장지 원산지 표기는 가공제조원만 표시한다. 이틈을 APP와 중국 헹안제지 등이 파고들었고, 원단만 국내 임가공업체에 보내 ‘대한민국산’ 타이틀을 얻게 됐다. 김 대표는 “화장지 제조원가의 60~65%는 주 원료인 원단”이라며 “나머지는 지관과 비닐팩, 가공 인건비와 물류비로 이뤄지는데 원단 자르고 지관을 꼈다고 국산으로 둔갑하는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가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최형창 기자
김동구 대왕페이퍼 대표가 지난 18일 전북 군산 본사에서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최형창 기자

저가공세로 시장 장악하면 주도권 완전히 넘어가

더 큰 문제는 외산 원단이 저가로 들어와 국내 시장을 잠식중인 점이다. 제지업계에 따르면 수입업자들은 APP 등의 원단을 국산 원단 보다 20~25% 저렴한 가격으로 가공업체에 팔고있다. 가뜩이나 200여 업체가 난립한 가공업계 입장에선 더 비싼 값을 주고 국산 원단을 쓸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무역협회 통계를 보면 2010년 8000톤에 불과했던 화장지 원단 수입량은 지난해 11만톤으로 14배 가까이 증가했다. 코로나19로 최근 몇년 주춤했으나, 올해 1~6월 전년 동기대비 32% 증가한 약 7만5000톤이 수입됐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이 추세라면 올해 수입 물량은 사상 최대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화장지 원단 제조 업계가 경쟁력 저하로 사업을 중단하면 결국 그 타격은 소비자가 입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처럼 펄프 가격이 급등하면 공급량이 부족해 특정국에는 원단을 납품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 쉬워서다. 뉴질랜드에서 화장지를 두고 비슷한 사태가 일어난 바 있다. 2년 전 국내에서 발생한 요소수 부족 사태도 이미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산 원단은 화학약품 하나를 쓰더라도 환경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의 엄격한 검사를 거치는 반면 외산 원단은 이 과정이 생략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같은 문제 의식을 일찌감치 감지한 일본은 자국산에는 '일본제(日本製)'라고 적힌 붉은색 마크를 부착한다. 김형진 국민대 임산생명공학과 교수는 “화장지, 물티슈 등 위생용지는 국민 생활과 밀접한 만큼 농산물처럼 원산지 표시제를 적용해 소비자들이 제대로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형창 기자 call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