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잘생겼고 방탕했다"…악명높던 미남, 죽은 후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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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
알콜·마약·방탕한 생활로
엉망진창이었던 삶이
가장 고요한 작품을 낳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모순덩어리'
알콜·마약·방탕한 생활로
엉망진창이었던 삶이
가장 고요한 작품을 낳다
그가 남긴 '아름다운 모순덩어리'
“저건 마치…. 노예 화가 같잖아.”
그 화가의 작업실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용했습니다. 그에게 싸구려 작업실을 마련해준 뒤 술을 넣어 주고, 마시라고 권하고, 작업이 끝나면 손에 술을 살 돈을 쥐여줬습니다. 작업실에 화가와 모델을 밀어 넣고 술 한 병을 준 뒤 “초상화를 완성하면 꺼내주겠다”며 문을 잠가버린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연료를 넣듯이, ‘술을 넣으면 돌아가는 그림 기계’로 화가를 이용한 겁니다.
놀라운 건 화가도 이런 모욕적인 대우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는 겁니다. 사실 그도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이렇게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파괴하는 생활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탓할 처지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꼴을 당하는 가장 큰 책임은 술을 끊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었으니까요.
이 대책 없는 알코올 중독자의 이름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의 삶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흥청망청 사는 게 미덕처럼 여겨졌던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는 방종한 생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은 놀랍도록 고요한 분위기가 풍깁니다. 가장 엉망으로 시끄럽게 살았던 사람의 작품이, 누구보다도 고요한 감성을 담고 있다는 모순. 그 모순을 낳은 화가의 기구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합니다.
이처럼 황당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이랬습니다. 원래 부자였던 모딜리아니 가문은 그가 태어날 때쯤 사업 실패로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됐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압류하러 집행관이 출동하게 됐는데, 하필 집행관이 도착한 게 막 출산이 시작됐을 때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는 ‘임산부나 산모의 침대, 그리고 그 침대에 있는 것들은 압류할 수 없다’는 오래된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딜리아니의 가족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출산 중인 산모 옆에 갖가지 귀중품들을 산처럼 쌓았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비극적이고 모순적인 삶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예고돼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모딜리아니는 아주 잘생기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천사처럼 잘생겼다”고 했지요. 그래서 평생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축복받은 외모와 달리 건강은 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여러 번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예술가가 되기로 한 것도 열네 살 때 고열에 시달리다 미술관이 나오는 환각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16살 때 결핵 진단을 받고 모딜리아니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결핵은 무서운 병입니다만, 당시에는 걸리면 천천히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역병이자 불치병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일 만큼요.
그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도 사실은 결핵을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정뱅이는 용서해도 결핵 환자는 절대 곁에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도시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팔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핵을 숨기기 위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했습니다. 그러면 기침하거나 피를 토해도 “술과 약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요.
리보르노와 피렌체, 베네치아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06년 스물여섯 살 때 세계의 미술 수도였던 파리로 떠났습니다. 처음 그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약간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옷을 귀족적으로 잘 차려입는 잘생긴 귀족 도련님 이미지였습니다. 피카소를 만났을 때 “당신은 천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패션이 엉망이라는 걸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할 정도로 ‘패션 자부심’이 넘쳐났지요. 하지만 1년 뒤 그는 거지꼴을 하고 다니게 됐습니다. 술과 마약을 사느라 돈이 없었거니와, 항상 뭔가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옷차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거든요.
이런 화풍은 당시 유럽 미술계에서 일고 있던 ‘아프리카 원시미술 붐’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전통 미술 작품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이국적인 양식이 작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거든요. 작가들은 말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서양 예술은 가짜다.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순수한 아프리카 조각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그런 작가였습니다. 고갱이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찾겠다며 아예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나버렸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타서였고요.
모딜리아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909년 현대 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밑에서 조각을 배우게 됐습니다. 브란쿠시 역시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영향을 받은 인물. 재료를 살 돈도 없었고, 먼지를 마셔 가며 돌을 깎아내는 작업이 몸에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지만, 모딜리아니의 작풍은 이때 확립됩니다. 당시 초상화가들은 모델을 실물과 닮게 그리는 데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잘 그려도 카메라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초상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상을 일부러 왜곡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진으로는 알 수 없는 모델의 성격을 드러내려고 한 거지요. 모딜리아니는 이런 생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화가였습니다. 앞에 있는 모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 인간의 무의식과 본능을 표현하려고 한 거지요. 예술계의 평가는 꽤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런 그림은 ‘모델과 너무 안 닮은 길쭉한 그림’일 뿐이었습니다. 너무 급진적이었던 거지요.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모딜리아니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술도 늘었습니다. 1917년 12월 열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도 해프닝만 남기고 끝났습니다. 화랑 주인이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을 가게 창문에 걸었는데, 이게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겁니다. 군중이 지나치게 몰리자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은 풍기 문란이라며 누드 그림을 떼라고 명령했습니다. 전시는 김이 빠져버렸고 모딜리아니의 좌절은 더욱 커졌습니다.
결핵과 음주, 마약, 가난, 방탕한 삶으로 모딜리아니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만신창이가 돼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그에게 예술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삶의 위안이자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복잡한 연애 관계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중독과 종잡을 수 없는 기질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습니다. 상대방이 모딜리아니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모딜리아니가 상대를 버렸고, 그때마다 그는 더 술을 마셨고, 결핵은 심해졌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사랑’ 잔 에뷔테른과의 사랑은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고도 비극적이었습니다. 1917년 33세의 모딜리아니와 19세의 에뷔테른은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뷔테른은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가 대비되는, 어딘가 이상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고, 딱 모딜리아니의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모딜리아니의 치명적인 매력과 재능 역시 정확히 에뷔테른의 취향에 들어맞았습니다. 둘은 서로를 격렬히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랑은 파괴적입니다. 부족한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갉아먹는 그런 관계.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이 그랬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에뷔테른과 함께 살며 아이까지 생겼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우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습니다.
어찌할 바 모르고 이를 지켜보던 에뷔테른. 1920년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인한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키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저 밤낮없이 모딜리아니의 곁을 멍하니 지키기만 했습니다. 지인들이 집에 누워 있는 모딜리아니를 발견한 건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만이었고, 그 사이 이미 상황은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에뷔테른이 왜 모딜리아니를 방치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나 당황하고 슬퍼서 그랬다’는 해석이 있지만 설득력은 없습니다. 의사에게 연락했다면 모딜리아니는 충분히 더 살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학자들은 말하니까요. 아마 에뷔테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곁에 있든 없든, 나는 살아갈 수 없어. 이제 함께 모든 걸 다 끝내자.’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에뷔테른은 배 속에 있는 둘째 아이와 함께 5층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세상은 그를 끊임없이 이용했습니다. 갈수록 모딜리아니를 둘러싼 아름다운 전설에 살이 붙었습니다. 수많은 책과 영화가 나왔습니다. 에뷔테른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나요”라고 물었을 때, 모딜리아니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답했다는 그럴듯한 대사도 생겨났습니다.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은 1959년에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생가에 “용기 있는 천재였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라는 명판이 붙었습니다. 기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1984년 리보르노의 박물관은 “모딜리아니가 집 근처 운하에 조각품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운하 바닥을 수색했습니다. 거기서 머리 조각 세 개를 발견했을 때는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됐지요. 하지만 이는 근처 대학생들이 관심을 끌기 위해 모딜리아니를 흉내 내 돌을 조각한 뒤 던져놓은 것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박물관장은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고요. 동네 빵집들은 이 사건을 기념해 조각상 모양의 커다란 빵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대학생들이 조각할 때 쓴 공구를 만든 회사는 “박물관장도 속이는 성능”이라며 제품을 홍보했다고 합니다.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런 해프닝이 계속되는 건 모딜리아니가 가진 이중성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 개인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빠져 자멸한 방탕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는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새 길을 개척해서, 어디에도 없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그림들을 남긴 거장이었습니다.
엉망진창이었던 삶과 고요한 예술세계의 대비. 죽고 나서야 전설이 된 역설. 그런 아이러니야말로 바로 삶이고 예술 아니냐는 듯, 슬프지만 모든 걸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은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그렇게 오늘도 수많은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생전 남긴 이 말과 함께요. “눈동자를 그려 넣지는 않았지만, 내 그림 속 인물들은 세상을 볼 수 있다네. 삶에 대한 말 없는 긍정을 표시하면서 말이야.” *이번 기사는 ‘Modigliani: A Life’(Jeffrey Meyers 지음)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도리스 크리스토프 지음, 양영란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을 중심으로 스미소니언 매거진의 기사 ‘Modigliani: Misunderstood’, 테이트의 ‘Five things to know: Amadeo Modigliani’ ‘Modigliani: man and myth’(모딜리아니의 딸 Jeanne Modigiliani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 화가의 작업실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화가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이용했습니다. 그에게 싸구려 작업실을 마련해준 뒤 술을 넣어 주고, 마시라고 권하고, 작업이 끝나면 손에 술을 살 돈을 쥐여줬습니다. 작업실에 화가와 모델을 밀어 넣고 술 한 병을 준 뒤 “초상화를 완성하면 꺼내주겠다”며 문을 잠가버린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연료를 넣듯이, ‘술을 넣으면 돌아가는 그림 기계’로 화가를 이용한 겁니다.
놀라운 건 화가도 이런 모욕적인 대우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는 겁니다. 사실 그도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이렇게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파괴하는 생활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탓할 처지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이런 꼴을 당하는 가장 큰 책임은 술을 끊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었으니까요.
이 대책 없는 알코올 중독자의 이름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의 삶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흥청망청 사는 게 미덕처럼 여겨졌던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는 방종한 생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은 놀랍도록 고요한 분위기가 풍깁니다. 가장 엉망으로 시끄럽게 살았던 사람의 작품이, 누구보다도 고요한 감성을 담고 있다는 모순. 그 모순을 낳은 화가의 기구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합니다.
‘천사 같은 미남’, 그 속은
모딜리아니의 어머니가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자택에서 진통을 시작한 날, 그의 집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식구들로 온통 분주했습니다. 출산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어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에 귀중품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이처럼 황당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이랬습니다. 원래 부자였던 모딜리아니 가문은 그가 태어날 때쯤 사업 실패로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됐습니다. 그래서 재산을 압류하러 집행관이 출동하게 됐는데, 하필 집행관이 도착한 게 막 출산이 시작됐을 때였던 겁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는 ‘임산부나 산모의 침대, 그리고 그 침대에 있는 것들은 압류할 수 없다’는 오래된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딜리아니의 가족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출산 중인 산모 옆에 갖가지 귀중품들을 산처럼 쌓았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비극적이고 모순적인 삶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예고돼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모딜리아니는 아주 잘생기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천사처럼 잘생겼다”고 했지요. 그래서 평생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축복받은 외모와 달리 건강은 신의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 여러 번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거든요. 예술가가 되기로 한 것도 열네 살 때 고열에 시달리다 미술관이 나오는 환각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16살 때 결핵 진단을 받고 모딜리아니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도 결핵은 무서운 병입니다만, 당시에는 걸리면 천천히 죽어갈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역병이자 불치병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일 만큼요.
그가 알코올 중독에 빠진 것도 사실은 결핵을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정뱅이는 용서해도 결핵 환자는 절대 곁에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는 도시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팔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핵을 숨기기 위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했습니다. 그러면 기침하거나 피를 토해도 “술과 약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었으니까요.
리보르노와 피렌체, 베네치아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906년 스물여섯 살 때 세계의 미술 수도였던 파리로 떠났습니다. 처음 그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약간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옷을 귀족적으로 잘 차려입는 잘생긴 귀족 도련님 이미지였습니다. 피카소를 만났을 때 “당신은 천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패션이 엉망이라는 걸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할 정도로 ‘패션 자부심’이 넘쳐났지요. 하지만 1년 뒤 그는 거지꼴을 하고 다니게 됐습니다. 술과 마약을 사느라 돈이 없었거니와, 항상 뭔가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옷차림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거든요.
팔리지 않았던 걸작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한번 보면 그 화풍을 잊지 못할 정도로 특이합니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의 얼굴과 목은 터무니없이 길고, 눈은 작고 아몬드 모양입니다. 분위기는 부드러우면서도 고요합니다.이런 화풍은 당시 유럽 미술계에서 일고 있던 ‘아프리카 원시미술 붐’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20세기 초 유럽 미술계에는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약탈해온 전통 미술 작품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그 이국적인 양식이 작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거든요. 작가들은 말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서양 예술은 가짜다.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순수한 아프리카 조각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이다.” 피카소와 마티스도 그런 작가였습니다. 고갱이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찾겠다며 아예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나버렸던 것도 이런 분위기를 타서였고요.
모딜리아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1909년 현대 조각의 거장 콘스탄틴 브란쿠시의 밑에서 조각을 배우게 됐습니다. 브란쿠시 역시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영향을 받은 인물. 재료를 살 돈도 없었고, 먼지를 마셔 가며 돌을 깎아내는 작업이 몸에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지만, 모딜리아니의 작풍은 이때 확립됩니다. 당시 초상화가들은 모델을 실물과 닮게 그리는 데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잘 그려도 카메라를 뛰어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초상화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대상을 일부러 왜곡해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 사진으로는 알 수 없는 모델의 성격을 드러내려고 한 거지요. 모딜리아니는 이런 생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화가였습니다. 앞에 있는 모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 인간의 무의식과 본능을 표현하려고 한 거지요. 예술계의 평가는 꽤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런 그림은 ‘모델과 너무 안 닮은 길쭉한 그림’일 뿐이었습니다. 너무 급진적이었던 거지요. 작품은 팔리지 않았고, 모딜리아니는 좌절에 빠졌습니다. 술도 늘었습니다. 1917년 12월 열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도 해프닝만 남기고 끝났습니다. 화랑 주인이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을 가게 창문에 걸었는데, 이게 지나치게 성공을 거둔 겁니다. 군중이 지나치게 몰리자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은 풍기 문란이라며 누드 그림을 떼라고 명령했습니다. 전시는 김이 빠져버렸고 모딜리아니의 좌절은 더욱 커졌습니다.
비뚤어진 사랑
모딜리아니 못지않게 주변 사람들도 어딘가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후원자들은 모딜리아니에게 “작품을 더 그리라”며 와인과 위스키, 코냑을 권했습니다. 친한 친구이자 후원자, 갤러리스트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사랑했는데, 너무 사랑한 나머지 화가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싫어하는데도 작업실에 자주 드나들었고,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애정이 없는 고객에게 판매를 거부하는가 하면, 반대로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그냥 줘버리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모딜리아니의 형편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결핵과 음주, 마약, 가난, 방탕한 삶으로 모딜리아니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만신창이가 돼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매달렸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그에게 예술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삶의 위안이자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복잡한 연애 관계였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여전히 매력적인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중독과 종잡을 수 없는 기질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습니다. 상대방이 모딜리아니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모딜리아니가 상대를 버렸고, 그때마다 그는 더 술을 마셨고, 결핵은 심해졌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사랑’ 잔 에뷔테른과의 사랑은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고도 비극적이었습니다. 1917년 33세의 모딜리아니와 19세의 에뷔테른은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뷔테른은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가 대비되는, 어딘가 이상하고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이었고, 딱 모딜리아니의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모딜리아니의 치명적인 매력과 재능 역시 정확히 에뷔테른의 취향에 들어맞았습니다. 둘은 서로를 격렬히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랑은 파괴적입니다. 부족한 두 사람이 서로 부딪히면서 서로를 갉아먹는 그런 관계.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이 그랬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에뷔테른과 함께 살며 아이까지 생겼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고, 바람을 피우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했습니다.
어찌할 바 모르고 이를 지켜보던 에뷔테른. 1920년 모딜리아니가 결핵으로 인한 치명적인 발작을 일으키자,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그저 밤낮없이 모딜리아니의 곁을 멍하니 지키기만 했습니다. 지인들이 집에 누워 있는 모딜리아니를 발견한 건 연락이 끊긴 지 일주일만이었고, 그 사이 이미 상황은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에뷔테른이 왜 모딜리아니를 방치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나 당황하고 슬퍼서 그랬다’는 해석이 있지만 설득력은 없습니다. 의사에게 연락했다면 모딜리아니는 충분히 더 살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학자들은 말하니까요. 아마 에뷔테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곁에 있든 없든, 나는 살아갈 수 없어. 이제 함께 모든 걸 다 끝내자.’
그리고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에뷔테른은 배 속에 있는 둘째 아이와 함께 5층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죽은 후 전설로, 그 지독한 아이러니
모딜리아니는 죽자마자 전설이 됐습니다. 젊고 잘생기고 방탕했던 천재 작가의 죽음과 불꽃 같은 사랑. 누가 봐도 화제가 되는 얘기였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친구였던 이들은 화가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퍼뜨렸습니다. 살아있을 때 충분히 잘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절반, ‘모딜리아니 전설’의 일부가 되려는 욕심이 절반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1922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 작품이 전시된 뒤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줘도 안 가진다던 그의 작품은, 지난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달러(2110억여원)에 낙찰될 정도로 비싸졌습니다.세상은 그를 끊임없이 이용했습니다. 갈수록 모딜리아니를 둘러싼 아름다운 전설에 살이 붙었습니다. 수많은 책과 영화가 나왔습니다. 에뷔테른이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나요”라고 물었을 때, 모딜리아니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눈동자를 그리겠다”고 답했다는 그럴듯한 대사도 생겨났습니다.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은 1959년에는 이탈리아 리보르노의 생가에 “용기 있는 천재였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라는 명판이 붙었습니다. 기막힌 일도 있었습니다. 1984년 리보르노의 박물관은 “모딜리아니가 집 근처 운하에 조각품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운하 바닥을 수색했습니다. 거기서 머리 조각 세 개를 발견했을 때는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됐지요. 하지만 이는 근처 대학생들이 관심을 끌기 위해 모딜리아니를 흉내 내 돌을 조각한 뒤 던져놓은 것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의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박물관장은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고요. 동네 빵집들은 이 사건을 기념해 조각상 모양의 커다란 빵을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대학생들이 조각할 때 쓴 공구를 만든 회사는 “박물관장도 속이는 성능”이라며 제품을 홍보했다고 합니다.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런 해프닝이 계속되는 건 모딜리아니가 가진 이중성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딜리아니 개인은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빠져 자멸한 방탕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는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으로 새 길을 개척해서, 어디에도 없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그림들을 남긴 거장이었습니다.
엉망진창이었던 삶과 고요한 예술세계의 대비. 죽고 나서야 전설이 된 역설. 그런 아이러니야말로 바로 삶이고 예술 아니냐는 듯, 슬프지만 모든 걸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인물들의 눈은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그렇게 오늘도 수많은 이들을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모딜리아니가 생전 남긴 이 말과 함께요. “눈동자를 그려 넣지는 않았지만, 내 그림 속 인물들은 세상을 볼 수 있다네. 삶에 대한 말 없는 긍정을 표시하면서 말이야.” *이번 기사는 ‘Modigliani: A Life’(Jeffrey Meyers 지음)과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도리스 크리스토프 지음, 양영란 옮김, 마로니에북스-타셴)을 중심으로 스미소니언 매거진의 기사 ‘Modigliani: Misunderstood’, 테이트의 ‘Five things to know: Amadeo Modigliani’ ‘Modigliani: man and myth’(모딜리아니의 딸 Jeanne Modigiliani 지음)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