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곡물의 안전한 수출을 보장하는 흑해 곡물협정을 파기했다.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크림대교에서 발생한 공격이 우크라이나의 소행이라고 밝힌 지 몇 시간 만이다. 흑해 곡물길 차단이 공식화되면서 우크라이나의 주요 수출품인 밀과 옥수수 선물 가격은 뛰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17일 기자들과의 전화 회의에서 “러시아 측 요구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부로 흑해 곡물협정은 효력을 잃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협정이 중단됐지만 러시아 측의 조건이 충족되면 협정 이행에 복귀할 것”이라며 협상의 여지도 남겼다.

흑해 곡물협정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도 우크라이나가 흑해 항구에서 곡물을 수출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합의다. 지난해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타결됐으며 이후 60일 단위로 연장해왔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 농산물과 비료 수출을 보장한 협정이 지켜지지 않는다며 탈퇴하겠다는 압박을 해왔다. 17일은 협정 만료일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며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서 밀과 옥수수 선물 가격은 1~2% 상승했다.

흑해 곡물협정의 종료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이 막히면서 지난해 전쟁으로 촉발된 세계 식량 위기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식량 인플레이션의 위험이 커진 것은 물론 우크라이나의 밀과 옥수수 등을 저렴하게 수입하던 중동과 아프리카 등은 식량난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곡창지대를 보유한 국가로 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씨 등이 주산품이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가 오데사 등 흑해 항구를 점령하며 수출이 막혔고, 수확한 곡물 수천만t이 썩어갈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국제 밀 선물 가격은 부셸당 11달러를 넘으며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식량 인플레이션은 지난해 7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보장하는 흑해 곡물협정이 타결되며 둔화됐다. 유엔에 따르면 흑해 곡물협정 이후 최근까지 약 3300만t의 곡물과 농산품이 우크라이나에서 세계로 수출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후 자국산 곡물과 비료 수출을 열어주지 않으면 협정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전쟁 이후 서방이 도입한 러시아 수출 제재로 곡물과 비료 수출이 여의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곡물과 비료 수출은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서방의 금융 제재로 곡물을 운송할 선박의 보험과 결제 등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 러시아는 흑해 3대 항구 중 한 곳을 봉쇄했다. 지난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곡물의 지속적인 유통을 허용해 달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곡물 회담 중재를 도왔던 스위스 제네바 인도주의대화센터(HDC)의 데이비드 할랜드 소장은 “러시아는 곡물협정의 대가로 얻는 것이 많지 않다고 느꼈고, 우크라이나를 압박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러시아의 냉소적인 움직임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다만 러시아가 요구사항 충족 시 협정에 복귀하겠다고 밝히면서 협정 연장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EU 관계자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그들이 여전히 문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협상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