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17세 흑인소년의 그 해 장진호 겨울…"韓 꼭 가고싶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美 참전용사 "최악의 추위…북한군·인종차별이란 2개의 적과 싸웠다"
"정찰 중 마주쳤던 북한 병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
생전 처음 미국 땅을 벗어난 17세 흑인 소년에게 1950년 한국의 겨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참전용사 칼 베일리(90)씨는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73년 전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경험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장진호 주변 언덕에 있던 미군의 전투용 탱크가 얼음 때문에 미끄러져 수면 위로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탱크가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수면 위에 그대로 떠 있는 거야. 알고 보니까 장진호 표면의 얼음 때문이었어. 무려 50톤(t)에 달하는 탱크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얼음이 두꺼웠던 것이었지. 장진호의 겨울은 그 정도로 추웠어"
베일리씨는 193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는 위도상 북한 평양보다도 북쪽 지역이지만, 대서양 연안 지역의 온화한 기후 덕에 베일리 씨는 한겨울에도 혹한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는 1950년 11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의 명칭이 유래한 곳이다.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미국 해병대 1사단에서 발생한 1만7천여명의 사상자 중 동상에 따른 사상자가 7천3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추위가 극심했다.
해군 잠수함 승조원이었던 베일리씨가 장진호의 추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정찰 임무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후 미국은 구(舊)소련이 바다를 통해 북한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동해안의 북한 항구를 봉쇄했다.
베일리씨가 탄 잠수함은 북한 항구를 오가는 선박을 탐지하고, 수상한 선박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베일리씨는 잠수함의 음파탐지기를 담당한 '소나병(兵)'이었지만, 잠수함이 정박하는 기간에는 주변 지역을 정찰하는 업무도 담당했다.
그는 한국전 기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찰 도중 한 북한 병사와 마주친 경험이라고 소개했다.
해가 지고 빠르게 주변이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눈앞에 북한 병사 1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베일리씨는 소총을 쥐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지자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병사도 놀랐는지 서로 눈만 바라보고 총을 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베일리씨와 또래로 보였던 북한 병사였다.
북한 병사는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나는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I am not mad at you)"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베일리씨도 "나도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라고 화답했다는 것이다.
베일리씨는 "이후 우리는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헤어져 각자 가던 길을 갔어. 북한 병사를 향해 등을 돌려야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어"라고 회상했다.
기자가 당시 베일리씨와 북한 병사가 서로 총을 쏘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그는 "서로 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아무런 원한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히려 한국전 당시 미군 내의 인종차별 분위기가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소개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고등학교를 중퇴한 상태였던 베일리씨는 해병대에 지원하려고 했지만, 모병소에서 마주친 백인 모병관의 인종차별적인 농담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는 해병대 대신 해군에 자원입대했지만,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상 해군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는 "당시 흑인 병사들은 2개의 적과 싸웠어. 앞에서 총을 쏘는 것은 북한군이고, 뒤에서 우리 등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은 같은 부대의 백인이었어"라고 말했다.
당시 군대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은 등에 총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는 자원입대해 한국전에 참전한 당시의 결정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면서 활짝 웃었다.
그는 해군 복무 후 육군과 주 방위군에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고, 전역 후에는 NBC 방송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흑인 고교 중퇴생이 한국전에 자원입대하지 않았더라면 군대에서 학업을 마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전국규모의 방송국에서 일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1955년 한국 복무를 마친 뒤 단 한 번도 한국을 재방문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지만, 은퇴할 때까지 정신없이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7명의 자녀에 증손주까지 둔 베일리씨는 "죽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다"며 "정찰 중에 마주쳤던 내 또래 북한 병사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찰 중 마주쳤던 북한 병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
생전 처음 미국 땅을 벗어난 17세 흑인 소년에게 1950년 한국의 겨울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참전용사 칼 베일리(90)씨는 지난달 12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73년 전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경험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장진호 주변 언덕에 있던 미군의 전투용 탱크가 얼음 때문에 미끄러져 수면 위로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탱크가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수면 위에 그대로 떠 있는 거야. 알고 보니까 장진호 표면의 얼음 때문이었어. 무려 50톤(t)에 달하는 탱크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얼음이 두꺼웠던 것이었지. 장진호의 겨울은 그 정도로 추웠어"
베일리씨는 193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는 위도상 북한 평양보다도 북쪽 지역이지만, 대서양 연안 지역의 온화한 기후 덕에 베일리 씨는 한겨울에도 혹한을 경험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는 1950년 11월 미군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불리는 '장진호 전투'의 명칭이 유래한 곳이다.
유엔군의 주축이었던 미국 해병대 1사단에서 발생한 1만7천여명의 사상자 중 동상에 따른 사상자가 7천3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추위가 극심했다.
해군 잠수함 승조원이었던 베일리씨가 장진호의 추위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정찰 임무 때문이었다.
전쟁 발발 후 미국은 구(舊)소련이 바다를 통해 북한에 전쟁 물자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동해안의 북한 항구를 봉쇄했다.
베일리씨가 탄 잠수함은 북한 항구를 오가는 선박을 탐지하고, 수상한 선박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베일리씨는 잠수함의 음파탐지기를 담당한 '소나병(兵)'이었지만, 잠수함이 정박하는 기간에는 주변 지역을 정찰하는 업무도 담당했다.
그는 한국전 기간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찰 도중 한 북한 병사와 마주친 경험이라고 소개했다.
해가 지고 빠르게 주변이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눈앞에 북한 병사 1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베일리씨는 소총을 쥐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지자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병사도 놀랐는지 서로 눈만 바라보고 총을 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베일리씨와 또래로 보였던 북한 병사였다.
북한 병사는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나는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I am not mad at you)"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베일리씨도 "나도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어"라고 화답했다는 것이다.
베일리씨는 "이후 우리는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헤어져 각자 가던 길을 갔어. 북한 병사를 향해 등을 돌려야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어"라고 회상했다.
기자가 당시 베일리씨와 북한 병사가 서로 총을 쏘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그는 "서로 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아무런 원한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반문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히려 한국전 당시 미군 내의 인종차별 분위기가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소개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고등학교를 중퇴한 상태였던 베일리씨는 해병대에 지원하려고 했지만, 모병소에서 마주친 백인 모병관의 인종차별적인 농담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는 해병대 대신 해군에 자원입대했지만,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시대 분위기상 해군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는 "당시 흑인 병사들은 2개의 적과 싸웠어. 앞에서 총을 쏘는 것은 북한군이고, 뒤에서 우리 등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은 같은 부대의 백인이었어"라고 말했다.
당시 군대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은 등에 총에 맞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그는 자원입대해 한국전에 참전한 당시의 결정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면서 활짝 웃었다.
그는 해군 복무 후 육군과 주 방위군에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고, 전역 후에는 NBC 방송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흑인 고교 중퇴생이 한국전에 자원입대하지 않았더라면 군대에서 학업을 마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전국규모의 방송국에서 일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1955년 한국 복무를 마친 뒤 단 한 번도 한국을 재방문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한국의 발전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지만, 은퇴할 때까지 정신없이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인지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7명의 자녀에 증손주까지 둔 베일리씨는 "죽기 전에 기회가 있다면 한국에 꼭 한번 가고 싶다"며 "정찰 중에 마주쳤던 내 또래 북한 병사는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