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6·23선언 발표 직후 김일성 5대강령 내놔…유엔 가입방식 등 놓고 대치
[평양NOW] 南 '6·23선언'·北 '조국통일 5대강령' 발표 50주년
23일은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이하 6·23 선언)과 김일성 주석의 '조국통일 5대강령'이 발표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박 대통령은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의지를 표명한 6·23 선언을 발표했다.

6·23 선언은 ▲ 평화적 통일을 민족 지상과업으로 규정 ▲ 남북한 내정 불간섭 및 상호 불가침 ▲ 7·4 남북공동성명에 입각한 지속적 남북대화 노력 ▲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불반대 ▲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불반대 ▲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의 문호 개방 촉구 등을 주 내용으로 한다.

정부는 6·23 선언에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기는 했지만, 분단 현실에 입각해 북한의 정치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사실상 공식화했다.

'침략자'로 규정해 북한의 접근을 차단했던 유엔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겠다는 뜻과 그동안 금기시했던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의지도 피력했다.

그러자 김 주석은 박 대통령이 6·23 선언을 발표한 지 4시간 만에 체코 공산당 제1서기 구스타우 후사크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조국통일 5대 강령을 전격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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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통일 5대강령의 주요 내용은 ▲ 남북 간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 상태 완화 ▲ 남북 간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 실현 ▲ 남북 각계각층과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 실시 ▲ 단독 유엔가입 반대 및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 등이다.

5대강령에서는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국호를 제시하며 연방제 통일 방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남북한 정부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회의' 대신 군중집회 형태의 '대민족회의' 소집을 요구한 것은 한국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인식됐다.

특히 북한은 6·23 선언이 '2개 조선'을 고착하려는 책동이고 분열주의 노선이라고 비난하면서 6·23 선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차단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남한은 유엔 '동시 가입'을, 북한은 '단일 의석 가입'을 주장하며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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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진행된 정치적 차원의 남북 대화 창구인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6·23선언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기도 했다.

또 1974년 8·15 경축식장의 박정희 전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을 일으킨 데 이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남침용 땅굴 굴착 등 대남 도발을 재개해 남북관계를 대치 국면으로 몰고 갔다.

남북한의 별도 통일방안 발표로 분단 이후 첫 남북한 통일 관련 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의 취지가 불과 1년 만에 무색해진 것은 양측이 국내외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려 한데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미중 데탕트(긴장완화) 영향을 받은 7·4 남북공동선언 직후 남한은 유신체제를, 북한은 주석제를 각각 도입해 독재를 강화했다"며 "박정희 정권은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고 했지만, 베트남식 공산화를 자신하던 북한은 생각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은 유엔 동시 가입을 통한 남북 긴장 완화로 베트남식 통일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여겨 격렬하게 반발했다"며 "5대강령은 통일전선 전술 강화를 통한 남한 내 친북세력 성장과 혁명 성공을 통해 통일하겠다는 입장을 체계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대남매체(우리민족끼리)는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5대강령에 대한 보도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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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