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돌아가시자 … 졸지에 빚더미 앉은 손녀 구제한 법원
대법 “자녀가 상속 포기하면 손자녀 의무 없어”
그간 판례로 혼란 … 민법 제1043조 해석 명확히 정립
자기도 모르는 ‘깜깜이 빚 상속’ 사라질 듯

할아버지·할머니의 채무를 어린 손자·손녀들이 떠안는 상황이 앞으로는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이 "자녀들이 상속을 모두 포기하는 경우 손자녀는 공동상속인이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놨기 때문이다.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피상속인)의 빚이 재산보다 많은 경우 상속인들은 상속을 아예 포기하거나 피상속인의 빚을 갚는 조건으로 상속받는 조건승인 제도를 활용한다. 대개 배우자가 한정승인을 신청하고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한정승인이란 빚과 재산을 함께 상속받되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제도다. 문제는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는 경우 그 채무가 상속 후순위인 손자녀들에게 넘어간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빚이 손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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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지난 3월 23일 A씨의 손자녀 4명이 서울보증보험을 상대로 낸 승계집행문 부여에 대한 이의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2015년 사망한 A씨에게는 아내 B씨와 4명의 자녀, 4명의 손자·손녀가 있었다. A씨가 남긴 재산보다 빚이 많자 B씨는 한정승인을 택했고 A씨의 자녀들은 모두 상속을 포기했다.

서울보증보험(보증보험)은 앞선 2011년 A씨와의 구상금 소송에서 승소해 부산지방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보증보험 측은 "A씨의 채무가 B씨와 손자녀들에게 공동으로 상속됐다"며 승계집행문을 2020년께 B씨와 손자녀들에게 보냈다. 승계집행문은 채무자의 승계인에게 강제 집행을 하는 경우 법원에 의해 부여되는 집행문이다.

졸지에 A씨의 빚을 떠안게 된 손자녀들은 이에 반발해 이의신청을 냈다. 원심은 "A씨의 손자녀들은 공동상속인이 맞다"며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이후 A씨의 손자녀들이 대법원에 특별항고하면서 사건은 대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다.

A씨의 손자녀들이 B씨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 이유는 민법에서의 상속 순서와 관련이 있다. 현행법상 자녀와 손자녀는 똑같이 상속 1순위다. A씨의 유족처럼 같은 순위의 상속인이 여럿인 경우 자녀를 손자녀보다 우선순위로 본다(민법 1000조 2항).

이때 배우자는 1순위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민법 1003조). 문자 그대로 보자면 A씨의 자녀가 상속을 포기했다면 자연스레 손자녀와 B씨가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단 뒤집히다

대법원은 손자녀들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사망한 채무자의 자녀가 전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가 있더라도 배우자만 단독상속인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상속 포기 재산에 대한 민법 조항을 들어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민법 1043조는 공동상속인 중 한 명이 포기한 상속분이 '다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고 정한다"며 "'다른 상속인'에는 배우자가 포함되므로 자녀가 포기한 상속분은 배우자에게 귀속된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상속을 포기한 자녀들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자녀들이 빚을 이어받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며 "자녀가 상속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배우자와 손자녀가 공동상속인이 된다고 보는 것은 당사자들의 의사는 물론 사회적인 법 감정에도 반한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자 … 졸지에 빚더미 앉은 손녀 구제한 법원
특히 대법원은 기존 판례가 소모적인 절차를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A씨의 손자녀처럼 공동상속인이 되더라도 결국 별도의 법적 절차를 거쳐 상속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기존 판례를 따르더라도 배우자가 단독상속인이 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됐다"며 "결국 쓸모없는 절차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2015년 대법원 민사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자녀가 상속을 포기한 경우 손자녀도 공동상속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당시 C사는 채무자인 이모씨가 빚 6억4000만원을 남긴 채 사망하자 이씨의 배우자와 자녀를 상대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요청했다. 이씨의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하자 C사는 "후순위 상속자인 이씨의 손자녀가 빚을 대신 갚으라"며 대여금 청구소송을 내 승소했다(2013다48852).

하지만 당시 재판부 역시 손자녀들이 별도의 소송을 거쳐 상속을 포기할 수 있다고 덧붙인 바 있다. 재판부는 "이씨의 자녀들 역시 채무가 손자에게 상속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며 "이씨의 손자는 상속포기를 한 다음 청구이의 소송을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대법원이 지적한 바와 일맥상통하는 셈이다.

간단해진 법률 관계... '깜깜이 빚 상속'도 사라진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례 변경을 두고 "상속에서 배우자의 지위와 민법 제1043조의 해석을 명확히 정립했다"며 "상속채무를 둘러싼 법률관계를 상속인들 의사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일반인들이 자신도 모른채 빚을 상속 받아 혼란을 겪는 사례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가사 전문 변호사는 "판례 변경 이전에도 손자녀들이 상속 포기를 요청하는 사례가 많았다"며 "부랴부랴 변호인을 찾는 경우는 확실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