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거든 혼외자에 20억 주겠다"…이 각서, 철회 가능할까요
증여자의 사망으로 효력 발생하는 ‘사인증여’
A씨, 내연녀와 파탄나자 “없던 일로 하자”
소송
법원 “효력 발생 전 언제든지 철회 가능”
판단
혼자서 쓴 유언장 내용과 달리 재산을 받을 상대에게 ‘죽은 뒤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한 계약 내용을 번복하는 것은 간단치 않다. ‘사인증여(死因贈與)’라고 불리는 이 같은 행위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증여자가 무효로 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오랫동안 법원에서 주를 이뤄왔다.

하지만 지난해 “사인증여도 유언에 따른 증여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처음 나온 뒤 사인증여에 대한 법조계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특별한 상황 아니어도 없던 일로 가능

대법원 민사 3부는 지난해 7월 A씨가 내연관계였던 B씨를 상대로 제기한 근저당권 말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B씨가 낳은 혼외자 C씨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A씨가 B씨에게 설정해준 근저당권 등기를 철회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A씨는 2012년 1월 ‘내가 죽거나 의식을 잃는 경우 재산의 40%를 B씨와 C씨에게 넘긴다’는 각서를 작성했다. 내용증명을 위해 각서와 자신의 인감증명서를 연결해 손도장을 찍었다. A씨는 2013년 4월엔 보유한 토지 중 일부에 근저당을 설정해 20억원가량을 C씨에게 상속한다는 각서도 썼다. C씨가 만 35세가 되기 전까지는 B씨가 재산을 관리하라고도 적었다. A씨는 “문득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될까 (걱정)해서 이 같은 글을 쓴다”는 내용도 각서에 남겼다. A씨는 한 달 후 B씨에게 이 토지에 관한 15억원의 근저당 설정등기를 해 이 같은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A씨와 B씨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내연관계가 파탄나자 A씨와 C씨의 관계도 단절됐다. 그러자 A씨는 2015년 2월 C씨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해달라는 ‘친생자 관계 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A씨가 C씨의 친부임을 인정하면서 B씨를 양육자로 지정했다. A씨가 매월 C씨의 양육비 200만원씩을 B씨에게 지급한다는 임의 조정도 이뤄졌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GettyImagesBank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GettyImagesBank
A씨는 과거에 쓴 각서 내용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2년 전 끝마친 근저당권 설정등기를 말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A씨는 “근저당권의 근거인 두 번째 각서 내용은 사후 내 재산을 C에게 무상으로 주겠다는 유언”이라며 “상대방 동의가 필요 없는 단독행위이기 때문에 효력이 발생하기 전에는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언에 따른 증여(유증)는 재산을 받는 사람이 동의하지 않아도 효력이 있으며, 증여자가 사망 전 언제든지 내용을 무효하거나 바꿀 수 있다.

B씨는 “두 번째 각서에 증여 사유로 적힌 ‘무슨 문제가 발생한 경우’는 사망이나 의식불명 등 A씨가 임의로 재산을 처분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에 단순한 생전 증여로 봐야 한다”며 “증여받는 사람은 C로 돼 있지만 나한테 관리‧처분권을 준다는 취지가 분명하다”고 맞섰다.

법원은 A씨의 각서 작성과 근저당권 설정 행위를 사인증여로 규정하면서도 유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정이 없어도 철회할 수 있다고 봤다. 1심과 2심에 이어 대법원에서도 이 같은 판단이 그대로 유지됐다. 대법원은 판결 당시 “민법 제562조는 사인증여에도 유증 관련 규정을 준용한다고 정하고 있고 제1108조엔 유증자는 효력 발생 전 언제든지 유언을 철회할 수 있다고 돼 있다”며 “사인증여는 실제적 기능이 유증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유증처럼 증여자의 최종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허술한 진위 기준 악용 사례 여전

사인증여는 내용의 진위를 증명하는 게 유증에 비해 간단한 편이다. 증여자가 자필로 증여 내용을 적지 않아도 효력이 인정된다. 인감도장 날인이나 인감증명서 첨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증여받는 사람이 동의했느냐 정도가 진위를 판단하는 가장 큰 쟁점이다.

이런 이유로 유언장이 법적 형식을 갖추지 못했을 때 사인증여라고 주장하는 일이 적지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서울 동교동 사저 처분을 두고 아들인 김홍걸 의원(삼남)과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차남)이 벌인 분쟁이 대표적이다. 이 여사는 2019년 6월 별세하기 전 “지방자치단체 및 후원자가 동교동 사저를 매입해 기념관으로 사용한다면 보상금의 3분의 1은 김대중기념사업회에 기부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홍일·홍업·홍걸에게 균등하게 나눈다”고 유언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GettyImagesBank
사진은 기사와 무관함. GettyImagesBank
하지만 유언장이 법에서 요구한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자 삼남인 김홍걸 의원은 “이 여사의 친아들인 내가 사저를 상속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홍일 전 의원(장남)과 김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이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에 김 이사장은 “유언 자체를 사인증여 의사표시로 봐야 한다”고 맞섰다. 그는 그 후 법원에 “동교동 사저 처분을 막아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받았다. 김홍걸 의원은 법원 결정에 불복해 이의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고했다. 김 의원이 2020년 말 항고를 취하하고 합의 의사를 보이면서 분쟁이 종결됐다.

장례식이 끝나고 별안간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 ‘사인증여 계약서’를 들이밀면서 상속받을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새로운 인물은 대체로 내연남, 내연녀, 혼외자, 친구, 이웃 등 가족이 아닌 사람일 때가 많다. 상속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던 가족으로선 억지 주장처럼 느껴져도 “효력이 없다”고 물리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다. 일단 증여자가 세상을 떠난 데다 사인증여 입증 조건이 그다지 까다롭지 않아서다. 설령 계약서가 위조됐더라도 이 사실을 뒤늦게 입증하긴 만만치 않다 보니 사인증여를 악용해 상속권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대형 로펌 가사상속 전문 변호사는 “최근에도 이처럼 사인증여 악용으로 인해 생긴 분쟁 사건이 계속 들어올 정도”라며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증여자 스스로 상속을 미리 설계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법의 맹점을 나쁘게 이용하는 부작용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