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한 엄마·불효자도 “유산 달라”니 …46년 된 유류분소송 '논란'
故 구하라 씨 친모, 20년 만에 나타나 유류분 소송
BYC, LG, 셀트리온, SK 등 재계서도 잇따라 제
·거론
1977년 도입 이후 46년 지나면서 제도 효용성 논란
2019년 가수 구하라 씨가 사망하자 20년 넘게 인연을 끊고 살던 친모가 나타나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구씨의 친모는 유류분 제도를 근거로 자신도 딸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법대로라면 친모는 친부와 5 대 5 비율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구씨의 친오빠는 “엄마로서 양육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친모를 상대로 상속재산분할심판청구 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구씨를 홀로 양육한 아버지의 기여분을 인정해 친모와 친부의 상속 비율을 4 대 6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의무를 지키지 않은 가족에게도 상속권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 논쟁을 불러일으킨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9년 세상을 떠난 가수 구하라 씨 영정. 연합뉴스
2019년 세상을 떠난 가수 구하라 씨 영정. 연합뉴스
유류분 제도는 1977년 민법 개정에 따라 도입돼 1979년 시행됐다. 유류분이란 가족이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유산 비율을 말한다.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더라도, 상속받는 사람은 법으로 보장된 유류분만큼은 반드시 받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상속이 이뤄지고 나서도 유족 간에 “유류분 제도에 근거해 재산을 다시 나눠야 한다”는 소송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전국 법원에 접수된 유류분 청구 소송 건수는 2010년 452건에서 2020년 1511건으로 10년 새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반대로 재산을 물려준 사람과 생전에 사이가 나빴거나,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가족조차 유류분 제도 덕분에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건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줄 잇는 재벌가 유류분 소송

재벌가 내에서도 유류분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이 빈번히 발생한다. 재벌가의 경우 상속 재산에서 회사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유류분 소송 결과에 따라 회사 경영권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재벌가의 유류분 소송 결과에 기업 관계자뿐만 아니라 투자자들도 주목하는 이유다.

속옷 업체 BYC 일가에선 1200억원 규모의 유류분 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다. 고(故) 한영대 전 BYC 회장의 배우자인 김모씨와 딸 한지형 BYC 이사, 한민자 씨가 차남 한석범 BYC 회장과 삼남 한기성 한흥물산 대표를 상대로 작년 12월 소송을 걸었다. 유류분 관련 민법 조항은 배우자와 자녀 등 직계비속은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부모 등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을 유류분으로 보장하고 있다. 김모 씨를 비롯한 원고 측은 자신들이 유류분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류분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생전에 배우자 및 자녀 등 공동상속인에게 증여한 재산(특별수익)도 포함해 산정한다. 한 전 회장의 경우 1980년대 말부터 계열사와 부동산을 물려주거나, 설립된 계열사에 BYC 주식을 헐값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넘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방식으로 한 전 회장이 자식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에 김모씨는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정한 유류분 비율 10%에 해당하는 재산을 돌려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 회장이 BYC의 경영권이란 특별수익을 쥐고 있으므로 자신들에게 유류분을 반환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달 23일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한 회장 측은 “지난해 2월 김씨가 상속 포기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모씨 측은 “한 회장의 기망에 의해서 상속 포기서를 줬다”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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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상 상속을 포기한 사람은 상속인이 아니라고 봐 유류분 반환 청구를 할 수 없다. 다만 유류분 권리자가 상속 포기 당시 인지하지 못한 재산에 대해서는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법조계에선 이번 소송의 쟁점이 ‘상속 포기의 효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불거진 LG가(家) 상속재산 분쟁도 초미의 관심이다.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구연수 씨가 구광모 LG그룹 회장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다. 2018년 5월 별세한 구 전 회장은 2조원 상당의 LG 주식 지분 11.28%를 자녀들에게 상속했다. 장자 상속 원칙이 있는 LG가답게 구 회장이 8.76%로 가장 많은 지분을 상속받았고 구연경 대표는 2.01%, 구연수 씨는 0.51%를 각각 받았다. 김 여사는 지분을 상속받지 못했다.

김 여사를 비롯한 세 모녀 측은 “상속이 완료되고 나서 유언장이 없음을 알게 됐다”며 재산 분할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협의 당시 구 회장이 선대 회장의 유지에 따라 합의서를 써야 한다고 해 그렇게 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 모녀는 법정 상속 비율인 배우자 1.5 대 자녀 1(1인당)의 비율로 회사 지분을 다시 나눠야 한다는 입장이다. 만약 세 모녀 측 주장을 법원이 받아들인다면 세 모녀의 지분율 총합이 구 회장 지분율을 넘어설 수 있다. 이에 대해 구 회장 측은 “이미 제척기간(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정기간)인 3년이 지났다”고 맞섰다.

세 모녀는 상속회복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원이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예비적으로 유류분 반환 청구를 했다. 다만 최근 세 모녀 측에서 유류분 반환 청구 부분은 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상속 전문 변호사는 “유류분은 피상속인의 증여에 따라 특정인에게 유산이 몰린 경우를 전제로 한 제도”라며 “이번 소송은 유류분보다 유족 간에 이뤄진 상속 합의가 적법했는지를 따지는 게 쟁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아직 상속이 이뤄지지 못한 재벌가를 중심으로 유류분 관련 분쟁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혼외자가 있는 경우 기업 승계 단계에서 유류분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현행법상 법적으로 혼외자임을 인정받았다면 혼인 중 출생한 자녀와 같은 비율로 상속권을 보장받는다.
셀트리온 송도 본사. 한경DB
셀트리온 송도 본사. 한경DB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의 혼외자 2명은 최근 친생자인지 청구 소송을 통해 서 회장의 법적 자녀로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서 회장의 유류분 권리도 갖게 됐다. 동시에 셀트리온의 승계 방정식도 복잡해졌다. 서 회장은 그룹 지주사인 셀트리온홀딩스 지분 97.19%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법정 상속 비율로 나누면 서 회장의 배우자는 지분 26.51%를, 두 아들과 두 혼외자는 한 명당 지분 17.67%를 상속받을 수 있다. 두 혼외자의 지분이 35.34%에 이르는 만큼 향후 경영권 분쟁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혼 소송 중인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동거인인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 사이에 혼외자를 두고 있다. 최 회장의 혼외자 역시 법적으로 친자임을 인정받는다면 유류분 권리를 갖게 된다. 최 회장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사이에 세 자녀를 뒀다.

“현실 안 맞는 낡은 제도”

유류분 제도가 현실과 맞지 않은 낡은 제도라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핵가족화 및 평균수명의 연장, 남녀평등 실현 등에 따라 유류분 제도의 입법 정당성이 오늘날 상당 부분 사라졌다는 얘기다. 유류분 권리자 간 형평성과 상속재산에 대한 기여 여부 등과 같은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는 게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점도 제도의 불합리한 점으로 꼽힌다.

현소혜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유류분 제도는) 지나치게 경직되고 의무의 범위도 넓으며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의 재산권 또한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연합뉴스
헌법재판소에는 유류분 제도의 위헌성을 따지는 사건이 약 40건 올라와 있다. 이 가운데 헌재는 지난달 17일 이모씨 등 5명이 “유류분 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민법 제1112조~제1116조 및 제1118조 등 6개 조항이 위헌”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 사건의 첫 공개 변론을 열었다.

청구인 측은 “배우자뿐 아니라 직계존비속, 형제자매까지 획일적·일률적으로 유류분 비율을 정하고 있어 매우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이해관계인 법무부 측은 “사회현실에 맞도록 유류분제도를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면서도 “제도의 개정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입법 정책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맞섰다.

앞서 헌재는 2010년과 2013년 두 번에 걸쳐 민법상 유류분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