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과 루벤스의 특별한 '젖'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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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의 문화살롱
■ 생명의 원천과 '역발상 지혜'
젖몸살 여인 고통 덜어주려고
아이처럼 젖 빠는 '굶은 남자'
굶어 죽는 형벌 받은 아버지에게
감옥 찾아 젖 물리는 딸의 마음
강·바다·母性은 '문명의 젖줄'
풍요로운 땅 상징도 '젖과 꿀'
고두현 논설위원
■ 생명의 원천과 '역발상 지혜'
젖몸살 여인 고통 덜어주려고
아이처럼 젖 빠는 '굶은 남자'
굶어 죽는 형벌 받은 아버지에게
감옥 찾아 젖 물리는 딸의 마음
강·바다·母性은 '문명의 젖줄'
풍요로운 땅 상징도 '젖과 꿀'
고두현 논설위원
화창한 봄날,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는 기차에 한 남자와 여자가 마주 앉아 있었다. 20대 초반 남자는 햇볕에 그을린 일꾼, 20대 중반 여자는 뚱뚱하고 모성적인 인상의 농촌 아낙이었다. 여자는 부잣집 유모로 채용돼 가는 길이고, 남자는 일자리를 얻으러 가는 길이었다.
무료한 시간이 지나고 해가 기울 무렵, 여자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가슴을 풀어 헤치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몸에서 젖이 오르는 것이었다. 젖먹이를 떼어놓은 지 이틀째, 젖몸살이 심해 병이 날 것 같았다. 남자는 허둥대며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 더듬거렸다. 여자가 “더 견딜 수 없다”며 자지러지자, 그는 치마 사이로 무릎을 꿇고 쭈그려 앉았다. 여자는 유모가 아기에게 하듯 젖을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목가(Idylle)’에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젖도 떼지 않은 애를 두고 남의 집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가는 여자, 그 여자의 젖을 어린애처럼 빨아먹는 낯선 남자…. 이 남자와 아이를 잇는 ‘젖’은 그야말로 ‘생명줄’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와 비옥한 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줄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물줄기도 이 같은 모성(母性)의 샘에서 발원한다.
‘여자의 일생’ ‘목걸이’ 등 모파상 소설에는 어머니와 여자 이미지가 여럿 겹쳐 있다. 그래서 한때 그의 이름을 ‘모(母)파상’이라는 여성적 어감으로 새겨보곤 했다. ‘어미 모(母)’라는 한자 역시 여자(女)의 안쪽에 젖가슴을 상징하는 점 두 개를 찍은 모습이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도 ‘젖’에 주목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반라의 노인이 젊은 여인의 가슴에 입을 대고 있는 형상의 ‘시몬과 페로’다. 언뜻 보면 야하거나 퇴폐적이다. 창밖에서 이들을 훔쳐보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내용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굶겨 죽이는 형을 받은 노인이 말라 죽어가는데 해산한 딸이 면회 때마다 감방으로 들어가 자기 젖을 먹여 살렸다. 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법정이 노인을 풀어줬다. 딸의 젖이 바로 생명수였다.
젖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아이가 제일 처음 먹는 음식이자 최고의 영양제다. 단백질과 지방, 탄수화물 등 필수 영양소가 다 들어 있는 완전식품이다. 따뜻한 체온과 한없는 애정, 달콤한 후각과 부드러운 촉감, 젖을 빠는 순간의 시각과 청각, 이런 요소를 모두 포함한 사랑의 유액이기도 하다.
프랑스어로 어머니(mere)는 바다(mer)와 같은 발음을 지녔다. 바다를 품은 존재가 어머니다. 한자 ‘바다 해(海)’도 어머니(母)를 품고 있다. 우리는 고생물학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생물이 바다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역사학자 쥘 미슐레도 바닷물을 ‘근원적인 젖’이라고 봤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역시 바다의 물거품에서 나왔다. 르네상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에서 아프로디테가 나체로 해안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렸다. 어머니와 바다, 젖과 강, 생명과 탄생의 액체성은 서로 닮았다. 그 속에서 인류 문명의 꽃이 피고 지혜의 샘이 솟아났다.
이들 사이를 잇는 ‘젖’은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 사회와 문명의 양안(兩岸)을 넘나든다. 관점을 바꾸면 바다와 강,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거꾸로 볼 수도 있다. 시인 폴 클로델은 바다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멋지게 뒤집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모든 강의 하구를 통해 대지의 젖을 빨아먹는 아기와 같다. ‘강은 대지의 실체가 액화된 것’이고 ‘대양이 거세게 빨아대는 바람에 대지의 가장 깊숙한 주름 속에 뿌리내리고 있던 액체인 젖이 분출한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왔다.
내일을 여는 미래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모파상 소설의 두 남녀 얘기는 자칫 외설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 순간 외설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바뀐다. 루벤스 그림도 퇴폐에서 성화(聖畵)로 재탄생한다. 반전을 이끄는 힘은 ‘역발상의 지렛대’에서 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동서남북이라는 기존 통념을 버리고 남반구와 북반구의 위치를 뒤집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거꾸로 세계 지도’도 그중 하나다. 고정된 방위 개념만 바꿨을 뿐인데 땅과 바다, 감각과 생각, 사고의 각도까지 달라진다. 김재철 동원그룹 창업주는 이 지도를 펼쳐놓고 미지의 바다를 개척했고 해양 경영의 신기원을 이뤘다.
천동설과 지동설 같은 인류사적 대전환도 ‘역발상의 지혜’ 덕분에 가능했다. ‘거꾸로 발상법’과 ‘뒤집어 생각하기’야말로 문명 도약의 탄력을 높이는 뜀틀이자 구름판이다. 거대 담론의 세계만 그런 게 아니다. 도도히 흐르는 ‘문명의 젖줄’도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지혜의 샘’에서 발원했다. 그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 들판과 초원을 비옥하게 적신 결과가 곧 지금의 인류사다.
무료한 시간이 지나고 해가 기울 무렵, 여자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더니 가슴을 풀어 헤치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몸에서 젖이 오르는 것이었다. 젖먹이를 떼어놓은 지 이틀째, 젖몸살이 심해 병이 날 것 같았다. 남자는 허둥대며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 더듬거렸다. 여자가 “더 견딜 수 없다”며 자지러지자, 그는 치마 사이로 무릎을 꿇고 쭈그려 앉았다. 여자는 유모가 아기에게 하듯 젖을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모(母)파상'으로 상상한 그 이름
깡마른 사내가 풍만한 가슴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젖을 빠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여자는 그의 등에 손을 올리며 다른 쪽도 부탁했다. 한참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여자가 “한결 좋아진 것 같다”며 고맙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라고 말했다. “사실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거든요.”기 드 모파상의 소설 ‘목가(Idylle)’에 나오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젖도 떼지 않은 애를 두고 남의 집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가는 여자, 그 여자의 젖을 어린애처럼 빨아먹는 낯선 남자…. 이 남자와 아이를 잇는 ‘젖’은 그야말로 ‘생명줄’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줄기와 비옥한 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줄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물줄기도 이 같은 모성(母性)의 샘에서 발원한다.
‘여자의 일생’ ‘목걸이’ 등 모파상 소설에는 어머니와 여자 이미지가 여럿 겹쳐 있다. 그래서 한때 그의 이름을 ‘모(母)파상’이라는 여성적 어감으로 새겨보곤 했다. ‘어미 모(母)’라는 한자 역시 여자(女)의 안쪽에 젖가슴을 상징하는 점 두 개를 찍은 모습이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도 ‘젖’에 주목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반라의 노인이 젊은 여인의 가슴에 입을 대고 있는 형상의 ‘시몬과 페로’다. 언뜻 보면 야하거나 퇴폐적이다. 창밖에서 이들을 훔쳐보는 사람까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내용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굶겨 죽이는 형을 받은 노인이 말라 죽어가는데 해산한 딸이 면회 때마다 감방으로 들어가 자기 젖을 먹여 살렸다. 딸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법정이 노인을 풀어줬다. 딸의 젖이 바로 생명수였다.
젖은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아이가 제일 처음 먹는 음식이자 최고의 영양제다. 단백질과 지방, 탄수화물 등 필수 영양소가 다 들어 있는 완전식품이다. 따뜻한 체온과 한없는 애정, 달콤한 후각과 부드러운 촉감, 젖을 빠는 순간의 시각과 청각, 이런 요소를 모두 포함한 사랑의 유액이기도 하다.
프랑스어로 어머니(mere)는 바다(mer)와 같은 발음을 지녔다. 바다를 품은 존재가 어머니다. 한자 ‘바다 해(海)’도 어머니(母)를 품고 있다. 우리는 고생물학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생물이 바다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역사학자 쥘 미슐레도 바닷물을 ‘근원적인 젖’이라고 봤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역시 바다의 물거품에서 나왔다. 르네상스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에서 아프로디테가 나체로 해안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렸다. 어머니와 바다, 젖과 강, 생명과 탄생의 액체성은 서로 닮았다. 그 속에서 인류 문명의 꽃이 피고 지혜의 샘이 솟아났다.
이들 사이를 잇는 ‘젖’은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 사회와 문명의 양안(兩岸)을 넘나든다. 관점을 바꾸면 바다와 강,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거꾸로 볼 수도 있다. 시인 폴 클로델은 바다와 어머니의 이미지를 멋지게 뒤집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모든 강의 하구를 통해 대지의 젖을 빨아먹는 아기와 같다. ‘강은 대지의 실체가 액화된 것’이고 ‘대양이 거세게 빨아대는 바람에 대지의 가장 깊숙한 주름 속에 뿌리내리고 있던 액체인 젖이 분출한 것’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나왔다.
반전의 지렛대 '거꾸로 발상법'
문화권별로 여성과 모성을 수용하는 방식이 다른 것도 이런 관점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미국 영화 스타들이 가슴을 강조하는 대신 파리의 프렌치 캉캉은 골반에 초점을 맞춘다고 분석했다. 미국인들이 우유를 많이 마시고, 유럽인들이 우유보다 치즈를 더 좋아하는 것도 이런 차이에서 연유했다고 한다.내일을 여는 미래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모파상 소설의 두 남녀 얘기는 자칫 외설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서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 순간 외설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바뀐다. 루벤스 그림도 퇴폐에서 성화(聖畵)로 재탄생한다. 반전을 이끄는 힘은 ‘역발상의 지렛대’에서 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가. 동서남북이라는 기존 통념을 버리고 남반구와 북반구의 위치를 뒤집으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는 ‘거꾸로 세계 지도’도 그중 하나다. 고정된 방위 개념만 바꿨을 뿐인데 땅과 바다, 감각과 생각, 사고의 각도까지 달라진다. 김재철 동원그룹 창업주는 이 지도를 펼쳐놓고 미지의 바다를 개척했고 해양 경영의 신기원을 이뤘다.
천동설과 지동설 같은 인류사적 대전환도 ‘역발상의 지혜’ 덕분에 가능했다. ‘거꾸로 발상법’과 ‘뒤집어 생각하기’야말로 문명 도약의 탄력을 높이는 뜀틀이자 구름판이다. 거대 담론의 세계만 그런 게 아니다. 도도히 흐르는 ‘문명의 젖줄’도 궁극적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지혜의 샘’에서 발원했다. 그 물줄기가 쉼 없이 흘러 들판과 초원을 비옥하게 적신 결과가 곧 지금의 인류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