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부동산 PF 부실 정리 미뤄선 안 된다
“맞아야 할 매를 먼저 맞은 셈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이달 초 서울 장충동 반얀트리호텔에서 열린 한경 밀레니엄포럼 기조 강연을 통해 지난해 레고랜드 및 흥국생명발 단기 자금시장 위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올해 들어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을 비롯한 은행들의 잇단 파산 사태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린 것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SVB 파산은 레고랜드 및 흥국생명 사태와 꼭 닮았다는 평가가 많다. 지난해 각국 중앙은행이 일제히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국채 가격이 급락(채권 금리 급등)했다. 대출 자산보다 장기 채권 보유 비중이 높았던 SVB의 예금 지급 능력에 불안이 커졌다. 이에 예금주들이 앞다퉈 자금을 빼내면서 ‘뱅크런’이 터졌다.

SVB 사태와 닮은 채권시장 위기

레고랜드와 흥국생명 사태 역시 고금리 기조로 자금 조달 부담이 커진 지방자치단체와 보험회사가 채무 상환 유예를 선언했고 시장에 공포가 퍼졌다. 신용등급이 높은 우량 기업조차 돈을 빌리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다행히 두 사태 모두 정부의 신속한 개입으로 일단락된 점도 비슷하다. SVB는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파산 이틀 만에 모든 예금을 한도 없이 전액 보증하겠다고 밝히면서 사태가 진정됐다. 레고랜드와 흥국생명 역시 당국의 압박으로 채무 상환 유예 조치가 철회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의 정책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한국은행은 레고랜드·흥국생명 사태 이후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과 공조해 ‘50조원+α’ 규모의 대책 마련에 참여했다. 지난 1월엔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 가운데 처음으로 기준금리 인상 랠리를 멈췄다. 미국 중앙은행(Fed)도 지난달 SVB 사태 직후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베이비스텝(0.25%포인트 인상)’을 밟으며 속도 조절에 나섰다.

구조조정 지연 땐 부실 쌓일 수도

이 원장의 발언도 이런 사실에 기반해 나왔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전문가들은 현재 가장 큰 리스크는 문재인 정부 때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부동산 부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미 시공능력 100위권 안팎의 중견 건설회사들이 쓰러지고 있다. 집값 하락으로 미분양이 쌓이는데 공사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다. 대형 건설사와 달리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형 건설사는 은행 대출 등 신규 자금 조달이 쉽지 않다. 건설업행정정보에 따르면 올해 폐업을 신고한 종합 건설사는 모두 129곳이다.

이 원장도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건설사들이 매주 2~3곳씩 부도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전국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 300~500곳을 추려 대형 건설사나 금융회사로 위기가 전이되지 않도록 중점 관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소형사는 몰라도 대형 건설사나 금융회사가 연루된 사업장에 대해선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시스템 위기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되레 털어내야 할 부실만 키울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맞아야 할 매를 먼저 맞았다고 해서 앞으로 매를 또 맞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구조조정이 지연될수록 맞아야 할 매가 하루하루 쌓여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