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감산(減産) 게임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지난달 29일 경기 이천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언급했다. 죄수의 딜레마란 협력이 모두에게 최선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선택 때문에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게임이론 모델이다. 그는 D램 업계가 처한 상황을 죄수의 딜레마에 빗대며 “다운사이클(침체기)에서 공급이 초과하면 가격 하락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업계에선 감산에 나서지 않는 삼성전자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반도체산업은 가장 대표적인 게임 현장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혹한기에 생산량을 늘리며 ‘치킨게임’의 승자가 됐다. 1990년대 들어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줄줄이 투자를 줄일 때 과감하게 늘려 마침내 세계 정상 자리에 올랐다. 이후 2001년과 2008년 등 반도체가 빙하기를 맞을 때마다 가격 경쟁을 벌여 모두 승리한 경험이 있다. 1990년대 15개 업체에 달한 D램 반도체 시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의 과점 구조로 재편된 것은 그 결과다. 삼성전자가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분야 1위에 오른 이후 줄곧 패권을 유지해온 배경이기도 하다.

이런 삼성전자가 지난 7일 반도체 감산을 공식화했다. ‘인위적 감산은 없다’던 그동안의 방침에서 전격 선회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인위적 감산은 반도체 대공황기이자 국내 외환위기 때인 1998년 이후 처음이다. 이번 감산 소식에 증시가 환호했다. 반도체 치킨게임이 해소될 것이란 안도감에서다. 고객사들의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촉매로 작용해 가격 반등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이란 예상이다. D램 가격 반등 시기가 올 4분기 정도에서 3분기로 앞당겨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감산을 발표하면서 “기술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인프라·연구개발 투자는 오히려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 때마다 투자 폭을 늘려온 삼성전자가 이번에도 승부수를 던졌다는 평가다. 올해에만 50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쏟아부어 AI(인공지능) 시장 성장 등으로 조만간 찾아올 해빙기를 맞겠다는 포석이다. ‘기술 초격차’를 위한 삼성의 치킨게임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유병연 논설위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