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미래과거시제' 출간…언어 실험·시공간 넘나든 작품
"AI가 소설 쓰면 작품 수 어마어마해질 것, 위기감도 있어"
배명훈 "SF는 판소리와 연결돼…모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죠"
"그때에 각국 수뇌가 급전(急傳)으로 상의하여/ 남국(南國) 북촌(北村) 기운 형세 개입키로 합의하고/ 항공모함 한 대를 내어 먼 바다 내놓으니…"(자진모리)
분명 텍스트인데 소리꾼이 신명 나는 우리 가락을 뽑아내는 듯하다.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의 전투담이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 판소리 장단에 펼쳐진다.

옛말체에 한자어가 더해져 문해력 테스트 같지만, 리듬감에 절로 '얼쑤~' 하는 추임새가 나온다.

2000년대 이후 국내 과학소설(SF) 장르를 선도한 배명훈(45) 작가가 판소리 SF를 시도했다.

최근 펴낸 7년 만의 소설집 '미래과거시제'(북하우스)에 수록한 단편 '임시 조종사'에서다.

수궁가, 적벽가 등 판소리 스토리를 변주한 수준이 아니다.

서사를 창작하고 '장단 메트로놈' 앱으로 장단을 익혀 전쟁 장면에 긴박하고 빠른 자진모리를 조합하는 식으로 8개월간 집필했다.

장르와 시공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시도와 지적인 탐구는 감탄스러운 작가의 통찰이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배명훈은 "19세기 판소리와 21세기 SF는 연결지점이 있다"고 했다.

"수궁가도, 흥보가도 모두 비현실적인 판타지잖아요.

수궁가에서 별주부가 육지에 올라와 처음 본 장면은 우주비행사가 외계 행성에 도착해 처음 본 장면과 같지 않을까요.

SF가 어떤 변화가 세계로 확산하는 과정을 그리는데, 판소리도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죠."
그는 세계에 관해 다루면서 언어의 문제가 따라왔다고 했다.

말의 근원을 해체하고자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근대소설가 이전의 옛말에 관심을 갖게 됐고 판소리가 눈에 들어왔다.

배명훈 "SF는 판소리와 연결돼…모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죠"
이번 소설집에는 '임시 조종사'뿐 아니라 언어 실험에 천착한 결과물이 더 있다.

표제작에선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사용하는 미래과거시제가 등장한다.

주인공의 옛 연인은 미래의 일을 과거처럼 말한다.

이때 한국어 과거시제 선어말어미인 '았/었' 대신 '암/엄'을 사용한다.

주인공은 갑작스럽게 사라진 연인이 시간여행자처럼 미래에서 온 인물이란 비밀을 풀고 다시 만나러 간다.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서 쓴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에선 파열음이 사라진 미래의 한국이 배경이다.

그는 이 소설 속 문장에서 'ㅊ, ㅋ, ㅌ, ㅍ, ㄲ, ㄸ, ㅉ, ㅃ' 등 파열음을 제거했다.

마치 오탈자처럼 '핑계'는 '빙계', '카타르시스'는 '가다르시스', '태블릿'은 '대블릿'으로 썼다.

팬데믹 이후 변화한 삶이 뉴노멀이 됐듯이, 그중 하나로 일상적인 도구인 말의 변화를 떠올렸다고 한다.

"우린 비말에 예민해지며 마스크를 쓰고 말하는 게 편할 정도가 됐죠. 말에 침이 튀는 소리가 빠지는 규칙이 적용되면 어떨지 생각해봤어요.

"
이처럼 '배명훈 월드'에는 낯선 미래 세계의 과거로서 현실을 들여다보게 하는 방식인 '인지적 소외'나 새로운 세계를 보는 순간의 '경이감' 같은 SF 미학이 촘촘히 배어있다.

돈 쓰는 재주가 있는 소비하는 로봇('수요곡선의 수호자'), 몸의 절반을 잃어 상반신이 기계인 사이보그('절반의 존재') 등과 일터에서 친숙하게 공존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배명훈 "SF는 판소리와 연결돼…모두 세계에 관한 이야기죠"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인 챗GPT 등으로 AI가 일상에 성큼 들어온 시대를 작가는 어떻게 바라볼까.

배명훈은 "SF에선 로봇이나 AI, 외계인이나 진화한 인간까지 다른 존재를 위협적이라기보다 동등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SF는 인간의 정상성을 많이 부정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AI가 소설 집필과 번역 등 텍스트 기반 영역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한 데 대해선 여느 창작자처럼 위기감도 갖고 있었다.

"AI가 본격 창작을 하면, 주문 생산도 가능하니 작품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지겠죠. 그걸 즐겨 읽는 독자도 있고, 사람이 쓴 작품을 따로 찾기도 한다면 (창작자의) 바이오그래피가 중요해질 것 같아요.

소비하는 로봇이 열심히 책을 사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이 직업이 유지될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
배명훈은 2005년 '스마트 D'로 SF 공모전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첫 소설집 '타워'가 출간 첫해 1만부가량 팔리며 주목받았다.

2010년 젊은작가상을 받아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아우르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대학 시절 과학 분야를 전공한 건 아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SF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딱 좋은 장르이고, SF를 쓰려면 국제정치학을 공부해야 한다"며 "초창기 SF가 과학 이야기였다면, 현대 SF는 기술이 만들어질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기술의 인문학적, 사회학적 효과에 관심을 많이 두게 됐다"고 짚었다.

근래 국내 문단에서 SF가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는데도, SF 비평이 부재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여전히 작가와 작품을 언급해주는 비평 시스템이 없어 (작품 활동이) 축적되지 않는 느낌"이라며 "그런데도 꾸준히 쓰는 건 좋아해서다.

스무살 즈음 평생 재미있게 할 두 가지를 발견했는데, 공부하고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고 떠올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