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처럼 노예같이 살기 싫어"…집 나간 '백수 아들' 끝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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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화가' 마르크 샤갈
가난한 부모님이 쏟은 애정
'운명의 여인' 아내와의 사랑
전설을 만들다
가난한 부모님이 쏟은 애정
'운명의 여인' 아내와의 사랑
전설을 만들다
생선가게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종일 무거운 생선 궤짝을 날랐습니다. 그러지 않을 땐 청어를 이 상자에서 저 상자로 옮겨 담았습니다. 손이 얼어붙는 건 일상이었고, 햇빛이 비치면 옷에 찌든 생선 기름이 빛을 반사해 불쾌하게 반짝였습니다. 그렇게 버는 돈은 고작 한 달에 20루블. 평균은 조금 넘겼지만 9남매를 먹여 살리기엔 벅찬 돈이었습니다. ‘마치 노예 같은 삶이다. 나는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아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들은 부모님께 말했습니다. “화가가 되고 싶어요. 미술 학교에 보내주세요.”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하늘과 별을 들여다볼 수 있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아버지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갔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습니다. “이 철없는 놈아. 정 그렇게 부모 속을 썩이고 싶다면 받아라.” 그리고 아버지는 돈을 꺼내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미술 학교 수업료, 5루블이었습니다. 누가 가져갈세라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돈을 주운 아들의 이름은 마르크 샤갈(1887~1985). 그는 훗날 ‘사랑의 화가’로 불리며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 거장 중 한 명이 됩니다.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그의 굴곡진 삶과 작품세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가엾은 아버지, 작품이 되다
생선가게 일꾼으로 아홉 남매를 먹여 살리는 아버지의 눈에는 언제나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성실했지만 과묵하고 무뚝뚝한 남자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말할 힘조차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교회를 다녀온 뒤 일터로 떠났습니다. 저녁쯤 녹초가 돼서 돌아온 뒤에는 식탁에 앉아 반쯤 졸며 초라한 식사를 입에 넣었습니다. 샤갈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슬픈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보였다.”
당시 유대인은 공립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50루블을 마련해 교사에게 뇌물을 찔러주고 샤갈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부모의 이런 사랑은 결국 샤갈의 인생을 바꿔놓고야 맙니다. 샤갈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가 부모님께 “미술 학교에 보내달라”고 한 게 19살 때. 없는 형편에도 뇌물까지 줘가며 장남을 가르쳐서 이제 보탬이 좀 되나 싶었는데, 예술가가 되겠다니 부모님이 좋아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결국 부모님은 아들의 말을 들어줬습니다.
길을 떠나는 샤갈에게 아버지는 종이 한 장을 쥐여 줬습니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얻어 온 유대인 통행 허가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유학을 떠난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후원자를 만나 1910년 파리로 갔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열심히 돈을 모은 샤갈 부부는 1923년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샤갈은 이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합니다.
1941년 샤갈과 벨라는 간신히 미국으로 탈출했지만, 이곳에서 샤갈 인생 최대의 불행이 닥칩니다. 망명 생활 3년 만에 벨라가 병으로 목숨을 잃은 겁니다. “암흑이 내 눈앞으로 모여들었다.” 샤갈은 이렇게 썼습니다. 고향인 비텝스크는 전쟁으로 파괴됐고, 유대인 학살로 수많은 고향 사람들이 죽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깊어져만 갔습니다. 혼자가 된 그는 1947년 그는 아내와의 추억을 좇아 프랑스로 돌아왔고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도시 생폴드방스에 정착했습니다.
언제나 사랑은 이긴다
하지만 샤갈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바바라는 여인을 만나 재혼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UN 본부와 시카고 예술 연구소, 파리 오페라 하우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등에 많은 벽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남기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97세가 되던 1985년,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새롭게 그릴 그림 이야기를 했습니다.독창성. 얼핏 보면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은 샤갈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독창성의 핵심은 ‘조화’였습니다. 샤갈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야수파 등 많은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샤갈은 고향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 유대인 특유의 정서,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그러니까 자신이 겪은 모든 걸 그림에 한데 녹였습니다. 예를 들어 샤갈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물고기는 그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결국에는 사랑입니다.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하고, 나를 나이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 그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결정되니까요. 샤갈의 그림처럼요.
사랑으로 가득 찬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기사는 마르크 샤갈(인고 발터, 라이너 메츠거), 샤갈(코그니에), 샤갈(프란츠 마이어), 꿈꾸는 마을의 화가(샤갈) 등 서적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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