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대구 서문시장 100년
대구 서문시장에는 소방차가 상시 대기 중이다. 1976년 12월 시장 내 3지구에서 발생한 화재로 650개 점포가 전소됐고, 그 자리에 주차빌딩과 소방파출소(대구중부소방서 대신119안전센터)가 들어섰다. 지금 서문시장에는 3지구가 없다. 3만4944㎡의 부지에 들어선 1·2·4·5지구와 동산상가·아진상가·건해산물 상가 등의 4600여 개 점포가 영업 중이다. 3지구 상인들이 화재 이후 옮겨간 곳이 동산상가다.

서문시장만큼 화재의 트라우마가 많은 곳도 없다. 20세기 이후 일어난 화재만 17차례. 화재는 역설적으로 시장을 현대화하는 계기가 됐다. 2005년 큰불로 1000여 개 점포가 사라진 2지구는 7년 후 첨단 방재시설과 주차장, 에스컬레이터 등 각종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현대식 상가로 재탄생했다. 2016년 11월 화재로 679개 점포가 타버린 4지구도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새 상가 건축을 추진 중이다.

서문시장의 전신은 대구장이다. 15~16세기 대구읍성 북문인 공북문 밖에 있던 대구장은 17세기 후반 읍성 서문인 달서문 밖으로 옮기면서 서문시장으로 불렸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육로와 낙동강 수운 덕분에 서문시장은 평양, 전주와 함께 조선 3대 시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저수지였던 천왕당못을 메운 현 위치(대신동)로 옮긴 것은 1923년. 일제는 도심 주거지 및 상권 확장을 위해 시장을 이전한다고 했지만 1919년 3·8 만세운동이 서문시장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서문시장은 6·25전쟁 후 전국 최대 포목·주단 시장으로 성장했다. 전쟁 특수를 누린 데다 제일모직, 대한방직, 삼호방직 등 섬유 기업과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섬유산업의 메카’로 이름을 떨쳤다. 서문시장에 유독 큰불이 잦았던 것도 섬유 가게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서문시장이 지난 1일로 대신동 이전 100주년을 맞았다. 전통시장의 위상이 옛날 같지는 않지만 서문시장은 시장통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군민대회가 여기서 열렸다. 대구 ‘3·8 만세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 민심의 바로미터라고도 한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서문시장을 찾는 이유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도 같은 이유로 해석된다. 서문시장이 ‘시장경제의 심장’으로서 더욱 힘차게 맥동하기를 기원한다.

서화동 논설위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