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에 따라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 대한 간섭·통제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제 추가로 공개된 반도체 보조금 신청의 세부 지침을 보면 영업과 기술 기밀 자료까지 다 내놓으라는 격이다. 개별 기업의 생산능력과 판매가격은 물론 소재·인건비 내용까지 제출해야 한다. 반도체산업에서 수율(收率), 소재·화학품, 판매가는 사업보고서에도 담기지 않은 중요한 경영 자료다. 이런 민감한 전략적 정보까지 제출 대상이다. 요구 자료에는 수익성 지표도 적지 않다. “향후 초과이익 환수를 강제할 사전 준비”라는 업계 걱정이 결코 과장스럽지 않다.

불과 1주일 전, 미국은 같은 법의 가드레일(안전장치) 규정으로 자국의 보조금 신청 기업에 대한 ‘대중국 투자 제한 조치’를 밝힌 바 있다. 10년간 첨단 반도체(18나노 미만 D램,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생산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한 게 핵심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신·증설 금지나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쯤 되면 적어도 반도체 문제에 관한 조 바이든 정부 행태는 한국의 ‘반도체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국 최강의 글로벌 경쟁력 산업인 반도체를 직접 통제·장악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이 전통의 시장경제를 버리고 계획·통제경제로 가겠다는 심산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요구다.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서 반도체가 중국을 포위하는 핵심 전선인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도 동맹국의 주력 산업까지 밟으려는 시도는 안 된다.

더구나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자국 투자를 한껏 부추겨놓고 뒤늦게 ‘보조금 부대조건’을 주렁주렁 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디테일의 악마’를 잔뜩 끼워 넣는 미국 반도체 지원법의 세부 규정은 전면 재조정돼야 마땅하다. 동맹국 간판 기업의 기밀까지 탈탈 털어 ‘반도체 식민지’를 기도한다는 소리를 들을 건가. 바이든 정부의 방향 전환을 먼저 촉구하지만, 우리 정부도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전에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