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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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홍남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5월 이임식에서 “국제기구와 신용평가사 등이 한국의 재정을 바라보는 시각이 점점 매서워지고 있다”며 “새 정부에서 재정준칙을 조속히 법령으로 제도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기재부는 2020년 재정준칙 도입 방안을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송영길·백재현 전 의원은 과거 재정준칙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부가 재정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 재정준칙의 취지에 여야 이견은 크지 않다. 하지만 재정준칙 법안은 좀처럼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경제논리와 무관한 정치논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IMF “재정준칙 법제화 미뤄선 안 돼”

선진국서 한국만 재정준칙 '나몰라라'…국가신용등급에도 악영향
27일 정부에 따르면 기재부는 지난해 9월 재정준칙 도입 방안을 발표하고, 관련 법안(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관리재정수지(통합재정수지에서 사회보장성기금의 수지를 제외한 지표)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하는 내용이다.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하면 한도 비율이 2%로 조정된다.

이를 통해 중장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을 60%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기재부 측 설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재정준칙이 없다면 2060년 한국 국가채무비율이 150%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재정준칙을 도입하지 않으면 2060년 1인당 국가채무가 1억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20년 발표된 옛 재정준칙 방안과 비교할 때 현 정부의 재정준칙은 더 간결하고 엄격해졌다. 복잡한 산식을 간단히 수정했고, 통합재정수지보다 더 엄격한 지표인 관리재정수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준칙을 시행령이 아닌 법률에 못 박아 구속력도 높였다.

새 재정준칙 방안이 공개되자 해외 신용평가사와 국제기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조속한 국회 통과를 주문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해 9월 “새로 도입한 재정준칙은 공공부문 부채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빅터 가스파르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지난 16일 최상대 기재부 2차관을 만나 “재정준칙 법제화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만 외면하는 재정준칙

국제기구와 글로벌 신평사가 한국의 재정준칙 법제화에 관심을 갖는 건 ‘글로벌 스탠더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IMF가 조사한 ‘재정준칙 도입 국가’ 현황을 보면 세계 주요국이 대부분 망라돼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 회원국은 물론 러시아 아르헨티나 이란 파키스탄 등도 이름을 올렸다. 2021년 기준 재정준칙을 도입한 국가는 모두 105개국에 달한다. OECD 38개국 가운데 재정준칙을 도입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시장에서는 이른 시일 내 재정준칙 법제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국제 신평사와 연례협의를 앞둔 상황이라 재정준칙 입법화에 실패하면 안정적인 국가신용등급 유지에 ‘빨간불’이 들어올 수도 있다. 기재부에 따르면 피치, 무디스와의 연례협의는 상반기,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의 협의는 연내 예정돼 있다.

법제화 지연은 국채 금리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외신인도가 낮아지면 국채 금리가 높아지고, 결과적으로 정부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시장 관계자는 “안 그래도 이미 국가채무가 계속 증가하고 있는 데다 최근 고금리 기조에 따라 국채 이자 부담이 급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채무는 2019년 723조2000억원에서 지난해(2차 추가경정예산 기준) 1068조8000억원으로 뛰었다. 국고채 평균 조달 금리는 2020년 연 1.38%에서 지난해 연 3.17%로 높아졌다. 국고채 이자 규모도 2020년 17조8000억원에서 올해 24조800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김학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재정준칙 법제화가 지지부진한 것은 임기제 선출직의 한계”라며 “건전 재정을 물려주자는 약속을 각종 핑계를 대면서 미루는 것은 자신들의 임기 중 재정을 마음대로 쓰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도병욱/황정환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