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동해 이재민, 임시조립주택 1년째…농토 일구며 일상 회복 노력
"가슴 쿵쾅", "불사용 기피" 트라우마 여전…"소방시설 마련되길"
[동해안산불 1년] ③ 잿더미 속 움트는 희망…"또 날까" 맘속 불씨 여전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날은 정말 떠올리고 싶지도 않아요….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또 왔네요.

"
1년 전 화마(火魔)가 삼킨 삶의 터전 위에는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두고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와 구수한 노랫가락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불길이 남긴 거무스름한 생채기가 여전히 곳곳에서 엿보였지만, 산과 들에는 또다시 푸른 싹이 돋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불 피해지에는 따스한 봄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난 24일 오전 강원 강릉시 옥계면 임시조립주택에서 만난 산불 피해 주민들은 다가오는 봄이 '희망'이자 '두려움'의 계절이라고 했다.

임시조립주택에서 홀로 1년째 사는 김옥자(92) 할머니는 화재 당시 불길이 마을을 에워싼 줄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다행히 김 할머니 바로 윗집에 살고 있던 엄정애(67)씨가 잠든 할머니를 깨워 숨가쁘게 집 밖으로 몸을 피했지만, 할머니는 눈앞에서 순식간에 집을 통째로 잃었다.

잿빛으로 뒤덮인 하늘과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대피 방송 탓에 마을은 아비규환이 됐다.

따스한 3월의 봄날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악몽'으로 변했다.

엄씨는 "매일 찾아가던 할머니의 집이 무너지는 광경을 코앞에서 목격했던 기억 탓인지 집에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천장이 무너질까 봐 겁이 나고, 가슴이 쿵쾅거린다"고 토로했다.

김 할머니의 아들 이정만(64)씨도 "옷이고 뭐고 어머니가 몸만 겨우 빠져나오느라 모든 걸 다 잃었다"고 했다.

아들 이씨 말 따라 김 할머니는 그날의 충격 탓인지 인덕션도 쓰지 못할 정도로 불을 다루는 일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다.

엄씨 역시 불을 볼 때마다 산불 기억이 떠올라 추운 날에도 쉬이 화목 보일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등 산불은 주민들에게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영역까지 앗아갔다.

당시 옥계에서 시작된 불길은 거센 강풍을 타고 동남쪽으로 번졌다.

그 영향으로 인근 동해시도 쑥대밭이 됐다.

[동해안산불 1년] ③ 잿더미 속 움트는 희망…"또 날까" 맘속 불씨 여전
같은 날 오후 동해시 초구동에서 만난 신원준(76)·손복예(67)씨 부부도 장애가 있는 딸과 함께 1년째 임시조립주택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 하나에는 세 식구가 매일 밤 살을 부대끼며 잠을 청하고 있었고, 거실이자 부엌으로 쓰는 공간에는 언제 떠날지 몰라 최소한으로 마련한 식기류와 일회용 생활용품들이 놓여 있었다.

"수십 년간 양봉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는데, 불이 난 뒤에 탄 냄새 때문인지 벌들이 잘 안 생기고, 이전만큼 회복이 잘 안 돼요.

남편도 화재로 인한 충격 때문인지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막막해요.

"
동해시는 이들에게 임대 아파트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유했지만, 마당에서 키우던 거위와 오리, 벌통을 두고 무작정 터전을 옮기긴 어려웠다.

이에 손씨 부부는 임시 주택 거주 기간을 1년 연장하고 앞으로 자리를 잡고 살아갈 장소를 물색하기로 했다.

남편과의 50년 추억이 담긴 사진 앨범까지 모조리 태워버린 불길이 야속하지만, 뒤뜰에 핀 땅두릅과 패랭이꽃을 위안 삼아 새 희망의 씨앗을 심고 있다.

[동해안산불 1년] ③ 잿더미 속 움트는 희망…"또 날까" 맘속 불씨 여전
손씨는 "마음이 복잡해 작물들을 심기 시작했는데, 그것들이 되레 나를 위로한다"며 "덕분에 소소하게 웃는 날도 생겼다"고 미소 지었다.

불에 타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진 땅 위로 다시 새 생명이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는 모습에서 이재민들은 다시 삶의 용기와 희망을 품으며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옥계면 김 할머니 역시 타버린 땅을 일궈 다시 작물을 심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재료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조립 주택 바로 옆에 마련한 비닐하우스에서 정성껏 말린 곶감을 안주 삼아 이웃들과 막걸리 한 잔을 나눠 먹으며 서로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고 있다.

[동해안산불 1년] ③ 잿더미 속 움트는 희망…"또 날까" 맘속 불씨 여전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면서 봄을 맞고는 있지만, 또다시 산불이 날까 봐 두렵기는 해요.

저희 마을에는 소방도로도 없어서 진화 작업을 벌이는 데도 굉장히 애를 먹었거든요.

당시에는 정말 마을이 다 타서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
옥계면 남양리 반장 손세규(64)씨는 어렵게 회복한 일상을 다시는 불에 잃고 싶지 않다고 털어놨다.

어느덧 계절의 시계가 한 바퀴를 훌쩍 돌았지만,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봄이면 언제든 또다시 큰불이 날 수 있다'는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손씨는 "산불이 나면 우리 마을은 고스란히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소방도로뿐만 아니라 급한 상황에서 불을 끌 수 있도록 상수도와 펌프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