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산업을 모태로 출범한 귀뚜라미그룹이 냉방 공조, 에너지 등 비(非)보일러 사업에서만 지난해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경제위기 때마다 싼값에 인수한 기업들이 2차전지·반도체 공장 증설과 원전 르네상스 수혜를 보며 그룹의 캐시카우로 거듭났다는 평가다.
귀뚜라미의 변신…非보일러 매출 1조 돌파
1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귀뚜라미그룹 계열사인 신성엔지니어링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54% 늘어난 2600억원을 기록했다. 신성엔지니어링은 2차전지용 드라이룸 공급 국내 1위 업체다. 냉각탑 국내 1위 업체 귀뚜라미범양냉방(2100억원)과 원자력 발전용 냉동 공조기 국내 1위 업체인 센추리(1600억원)도 각각 매출이 전년보다 22%, 11% 뛰었다.

이들 3사를 포함한 지난해 냉방 공조사업 매출은 7200억원으로 전년 대비 30.9% 증가했다. 여기에 귀뚜라미에너지(옛 강남도시가스)의 예상 매출(2700억원)과 방송(TBC), 외식(닥터로빈) 등 비(非)보일러 분야 매출을 모두 합치면 1조15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그룹 전체 추정 매출 1조6000억원의 72%를 비보일러 분야에서 거둔 것이다. 그룹의 주력이던 난방 매출(4500억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아래로 떨어졌다. 1969년 귀뚜라미보일러가 설립된 이후 53년 만에 이 같은 주력 산업 비중 변화가 나타났다.

그룹 체질 개선 및 실적 개선의 선봉에 선 것은 신성엔지니어링이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2차전지 제조업체의 헝가리 폴란드 말레이시아 공장 증설에 잇달아 참여하며 수혜를 봤다.

1995년 2차전지용 드라이룸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신성엔지니어링은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도 초저습을 구현하고 공기의 흐름을 순환·통제하는 드라이룸 설계·제조 능력에서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2차전지를 제조하기 위해선 상대습도 0.5% 수준의 초저습 환경(빨랫감이 1시간 만에 모두 마를 정도의 습도)을 갖춰야 해 드라이룸 수요가 갈수록 늘고 있다. 센추리도 올 하반기부터 프랑스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중국·스페인 원전 등에서 본격적인 매출이 발생한다.

귀뚜라미그룹의 냉방 공조 3사는 경제위기 때 M&A로 그룹에 편입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귀뚜라미그룹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전후로 범양냉방, 신성엔지니어링, 센추리를 연거푸 인수했다. 법정관리 상태이거나 부도가 난 기업, 이전 소속 그룹에서 비주력 사업으로 밀려 매물로 나온 회사들이었다. 이들은 귀뚜라미 가족이 된 후 매출은 2배, 해외 매출 비중은 10~60배가량 증가했다. 50여 년간 무차입 경영을 고수하는 ‘현금 부자’ 귀뚜라미그룹이 경기 악화를 싼값에 알짜기업을 인수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한 것이다.

‘M&A 실탄’을 대거 보유한 귀뚜라미그룹은 최근 다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등 복합 경제위기 상황이 2008년과 비슷해 또다시 기업 인수에 유리한 조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최진민 귀뚜라미그룹 회장은 임원들에게 “시너지를 낼 우량한 기업을 발굴해 그룹이 한 단계 도약할 기회로 만들자”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