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유통사의 자체브랜드(PB) 상품을 팔지 않는 건 유통기업의 불문율이다. 막대한 자본과 노력을 투입해 자신들만의 PB를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에 경쟁자의 PB를 키워주는 건 ‘자폭’과 다를 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쿠팡은 이마트의 PB인 ‘노브랜드’를 팔지 않고, 이마트는 쿠팡의 PB ‘곰곰’과 ‘코멧’을 매장에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유통업계 일각에서 이 암묵적 룰에 균열이 발생할 조짐이 나타나 관심을 끈다. 가격은 물론 품질 면에서도 제조사 브랜드(NB)에 뒤처지지 않는 PB 상품이 속속 등장하면서다. 앞으로는 경쟁 회사 상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유통기업이 만든 PB를 무조건 배척하긴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킴스클럽'이 쿠팡서 히트…PB 장벽 무너진다

쿠팡서 더 많이 팔리는 킴스클럽 PB

31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랜드킴스클럽의 PB ‘오프라이스’의 화장지는 1년여 전부터 쿠팡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 화장지는 킴스클럽보다 쿠팡에서 판매되는 양이 더 많다.

킴스클럽은 오프라이스 화장지를 기획하면서 ‘NB 제품보다 싸면서도 질 좋은 상품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담당 상품기획자(MD)는 전국의 모든 화장지 제조 공장을 돌다가 해외까지 시야를 넓혔다.

결국 펄프 자원이 풍부하면서도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네시아에서 원하는 조건을 맞출 수 있는 공장을 찾았다. 10m당 가격이 화장지 전문 제조사에서 만든 제품보다 15~30% 저렴한 오프라이스 화장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킴스클럽은 오프라이스 화장지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뛰어난 화장지로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유통사 간 장벽을 뛰어넘어 보자’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이 아이디어는 “경쟁사 PB 상품이라도 값이 싸고 질이 좋으면 받아들이겠다”는 쿠팡과 합이 맞아 현실화할 수 있었다.

쿠팡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킴스클럽 PB 화장지는 올해 판매량 200만 개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킴스클럽 관계자는 “오프라이스 화장지뿐 아니라 다른 상품들도 경쟁 유통사에서 팔릴 수 있도록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상반기 중 홍콩 등으로의 수출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PB가 독립 브랜드로

오프라인 점포가 없는 홈쇼핑업체들도 백화점 등 오프라인 유통업체에 PB 상품을 입점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고 있다. 홈쇼핑 PB로 시작해 별도의 브랜드로 독립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CJ ENM 커머스 부문(CJ온스타일)의 PB ‘오덴세’가 그렇다. 리빙 브랜드 오덴세는 CJ온스타일의 PB로 시작해 지금은 백화점 빅3인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3사에 모두 입점했을 정도로 인지도를 키웠다.

CJ ENM은 올해 초 자회사인 브랜드웍스 코리아에 오덴세를 비롯해 패션 브랜드 ‘다니엘 크레뮤’ 등의 영업권 등 유·무형 자산을 모두 양도했다. CJ온스타일 관계자는 “오덴세는 이제 PB라는 틀에 가둬두기 어려울 정도로 큰 브랜드로 성장했다”며 “앞으로 경쟁력 있는 PB를 키워 다양한 신규 사업을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국내 유통업계에서 ‘남의 PB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정서가 더 강한 만큼 아예 해외의 문을 두드리는 곳도 있다.

이마트는 중국에 20여 개, 미국에 50여 개 현지 유통업체를 통해 노브랜드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마트는 국내에선 항공사 진에어에 기내식으로 노브랜드 과자를 납품하는 것 외에는 다른 업체에 노브랜드 상품을 공급하지 않는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