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의 신"…다빈치 이긴 '국민 화가' 그림 어떻길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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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먹은 돈 갚아라”
황제에 큰소리친 알브레히트 뒤러
탁월한 실력, '자기PR'로
당대 다빈치·미켈란젤로보다 인기 높아
황제에 큰소리친 알브레히트 뒤러
탁월한 실력, '자기PR'로
당대 다빈치·미켈란젤로보다 인기 높아
1520년 8월 2일 벨기에 앤트워프의 한 여관방. 어두운 등불 아래, 중년의 남자가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이따금 뭔가를 웅얼거리며 펜을 든 손을 움직이는 걸 보니 중요한 일을 하는 모양입니다. 뭐라고 혼잣말을 하는지 한 번 들어볼까요.
“그때 그 식당에서 팁을 너무 많이 냈군. 그래도 상대방이 밥을 샀으니…. 계산해보니 이득이야. 아니다, 내가 준 선물값을 생각하면 손해인가. 아쉽다 아쉬워….” 그때 남자의 아내가 침대에서 벼락같이 일어나 소리를 칩니다. “지긋지긋한 양반아, 쪼잔하게 이 밤중까지 그런 거나 계산하고 앉아있어? 빨리 잠이나 자!”
밤늦게 가계부의 자잘한 내용을 챙기던 이 사람, 꼼꼼한 장사꾼인가 싶지만 사실은 예술가였습니다. 그것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였죠. 그는 이때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돈을 떼먹은 사람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네덜란드·이탈리아 왕 카를 5세였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세계 최강자’에게 돈을 떼였을 때 ‘똥 밟았다’ 생각하고 참았을 겁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뒤러의 집착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여행에서 꼼꼼히 일지를 적었는데, 책 한 권 전체가 다 돈 이야기입니다. 숙박비나 식비는 물론 언제 과소비했다느니, 이발비가 어떻다느니 하는 내용이 깨알같이 적혀있지요. 역사학계에선 이 일지를 당시의 물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할 정도입니다. 돈을 이렇게나 밝히는 사람이 어떻게 훌륭한 예술가가 됐을까요? 예술은 돈과 거리를 둬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선 뒤러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사실 미술과 돈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미술의 본질이 사치품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밥을 굶는 사람들에게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 덩어리죠. 하지만 돈이 넘쳐나는 사람에게 미술품은 ‘개성과 품격을 과시할 수 있으면서 수익률도 좋은 투자처’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미술 강국은 상업이 발달한 곳, 미술품 수요자인 부자와 귀족이 많았던 곳, 그래서 그림만 그리고도 먹고 사는 게 가능했던 곳이었습니다. 경제 전성기 베네치아와 스페인, 플랑드르, 프랑스에서 찬란한 미술이 꽃피웠던 것처럼요. ‘독일 화가’ 하면 떠오르는 옛날 사람이 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이야 독일이 유럽 최고의 부자 나라이자 현대미술 강국이지만,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은 한 번도 하나의 국가로 엮인 적이 없었거든요. 오랜 세월 독일은 100개 넘는 제후국과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미술품을 사들이는 계층, 즉 대귀족이 다른 나라보다 적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최고 거장인 페테르 폴 루벤스가 독일 태생이지만 평생 작품 활동을 벨기에(플랑드르)에서 한 데에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공교롭게도 뒤러가 죽음을 맞이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여행 중 뒤러는 근처 해안에 죽은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평생 내륙 지방에 살던 뒤러, 고래를 한번 보고 싶어서 헐레벌떡 달려가는데요. 도착해 보니 아쉽게도 고래는 파도에 떠밀려가 있었고, 너무 열심히 뛰어가서 그랬는지 열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 후유증에 계속 시달리다가 8년 뒤인 1528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뒤러의 유산은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화가들은 뒤러 이후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을 알리고 브랜드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러가 선진 미술을 전파한 덕분에 독일을 비롯한 중북부 유럽에서 새로운 미술 사조가 꽃피기 시작했고요. 수준 높은 판화를 제작한 덕분에 유럽에서 시각예술이 대중화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도 그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 토끼의 보슬보슬한 털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인상적인 수채화입니다. 521년 전 그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실적이지요. 워낙 잘 그려서 그런지, 토끼의 해인 올해 자주 보이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뒤러의 이야기를 다룬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 그림 때문입니다. 내일이 토끼의 해 설날이니까요.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최근 네이버 구독자 1만명을 돌파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 덕분입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올해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때 그 식당에서 팁을 너무 많이 냈군. 그래도 상대방이 밥을 샀으니…. 계산해보니 이득이야. 아니다, 내가 준 선물값을 생각하면 손해인가. 아쉽다 아쉬워….” 그때 남자의 아내가 침대에서 벼락같이 일어나 소리를 칩니다. “지긋지긋한 양반아, 쪼잔하게 이 밤중까지 그런 거나 계산하고 앉아있어? 빨리 잠이나 자!”
밤늦게 가계부의 자잘한 내용을 챙기던 이 사람, 꼼꼼한 장사꾼인가 싶지만 사실은 예술가였습니다. 그것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였죠. 그는 이때 ‘떼인 돈’을 받아내기 위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돈을 떼먹은 사람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네덜란드·이탈리아 왕 카를 5세였다는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세계 최강자’에게 돈을 떼였을 때 ‘똥 밟았다’ 생각하고 참았을 겁니다. 하지만 돈에 대한 뒤러의 집착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여행에서 꼼꼼히 일지를 적었는데, 책 한 권 전체가 다 돈 이야기입니다. 숙박비나 식비는 물론 언제 과소비했다느니, 이발비가 어떻다느니 하는 내용이 깨알같이 적혀있지요. 역사학계에선 이 일지를 당시의 물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할 정도입니다. 돈을 이렇게나 밝히는 사람이 어떻게 훌륭한 예술가가 됐을까요? 예술은 돈과 거리를 둬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선 뒤러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가난해야 예술가? 돈과 미술은 ‘불가분의 관계’
‘진정한 예술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유로운 그의 예술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가난하지만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고집하고, 약간 미쳐 있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죽은 뒤 재평가를 받고 전설이 되는 그런 인물이지요. 반면 돈에 연연하는 화가들은 ‘속물’이라는 얘기를 듣기가 십상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인류사에 남은 명작 미술품 대부분은 ‘돈 받으려고 만든 작품’입니다. 현대미술을 빼놓고 얘기하더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후원자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고요. 미켈란젤로 역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단순히 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존심 때문에 돈을 원하는 예술가들도 많습니다. 작품값은 곧 화가의 가치와 작품의 수준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사실 미술과 돈은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미술의 본질이 사치품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밥을 굶는 사람들에게 그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 덩어리죠. 하지만 돈이 넘쳐나는 사람에게 미술품은 ‘개성과 품격을 과시할 수 있으면서 수익률도 좋은 투자처’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미술 강국은 상업이 발달한 곳, 미술품 수요자인 부자와 귀족이 많았던 곳, 그래서 그림만 그리고도 먹고 사는 게 가능했던 곳이었습니다. 경제 전성기 베네치아와 스페인, 플랑드르, 프랑스에서 찬란한 미술이 꽃피웠던 것처럼요. ‘독일 화가’ 하면 떠오르는 옛날 사람이 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금이야 독일이 유럽 최고의 부자 나라이자 현대미술 강국이지만,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은 한 번도 하나의 국가로 엮인 적이 없었거든요. 오랜 세월 독일은 100개 넘는 제후국과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미술품을 사들이는 계층, 즉 대귀족이 다른 나라보다 적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최고 거장인 페테르 폴 루벤스가 독일 태생이지만 평생 작품 활동을 벨기에(플랑드르)에서 한 데에도 이런 이유가 작용했습니다.
다빈치·미켈란젤로보다 인기 높았던, 뒤러
이런 ‘미술 변방’에서 뒤러는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보다도 인기가 높았을 정도입니다. 이건 그림 실력만 뛰어나다고 거둘 수 있는 성과가 아닙니다. 뒤러의 천재적인 ‘기업가 정신’이 이런 업적을 가능케 했습니다. 요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뒤러의 전략은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그의 삶과 성공 비결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당연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탄탄한 기본기입니다.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세공 교육을 받던 그는 15세 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동네 공방에서 4년간 그림을 배운 뒤 두 번이나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옵니다. 당시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독일 화가는 뒤러가 유일했습니다. 어릴 적 배운 금속 세공은 그에게 손재주와 판화 제작 실력을,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선진 화풍과 기법은 탁월한 그림 실력을 줬습니다. 특히 그의 판화는 지금 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밀했습니다. 혁신 정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갖고 있습니다. 1493년 그가 그린 자화상은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은 ‘서양미술사 최초의 본격적인 독립 자화상’입니다. 13세 때 드로잉으로 그린 자화상은 그때까지의 ‘최연소 자화상’, 1500년 그린 알몸 자화상은 ‘미술사 최초의 누드 자화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수준의 ‘브랜딩 전략’과 칼 같은 경제 관념이 더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니셜 ‘AD’를 조합한 기호를 만들어 그림에 새겼습니다. 일종의 브랜드를 만든 겁니다. 뒤러는 이 브랜드를 근거로 자신의 그림과 서명을 베낀 이탈리아 판화가와 출판사에게 ‘최초의 미술 저작권 소송’을 걸어 이기기도 했습니다. ‘자기 PR’도 전문가 수준이었습니다. 불과 28세 때 뒤러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처럼 연출해 신격화했습니다. 자신이 그림의 신이나 다름없다는 자신감이죠.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정면 자세와 좌우대칭, 삼각형 구도 등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그림에만 쓰였던 방식과 구도”라고 설명했습니다. 한술 더 떠서 뒤러는 배경에 금색 물감으로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의 나이에 지울 수 없는 색채로 자신을 그렸다”는 자화자찬까지 합니다. 실력이 어설프다면 욕먹기 딱 좋은 행동이지만, 워낙 그림이 뛰어난 덕분에 뒤러의 권위는 크게 높아집니다. “좀 그렇긴 한데, 뒤러가 이 정도 잘난 척할 자격은 있지.” 뭐 이런 반응이었죠. 몇몇 작품에서는 귀여운 자기 자랑도 눈에 띕니다. 종교 벽화 ‘장미 화관의 축제’에서는 구석에 “뒤러가 5개월 만에 그렸지롱”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린다든지, ‘학자들 사이의 그리스도’ 한쪽에 “뒤러가 5일 만에 그린 그림”이라고 적어놓은 게 대표적입니다. 뒤러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건 그의 판화입니다. 당시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작품은 웬만한 귀족들조차 도저히 구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한 번 눈으로 보기도 힘들었죠. 하지만 뒤러의 작품은 판화였기에 여러 장 찍혀서 여기저기 팔렸습니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뒤러는 고든 램지,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는 하루에 한 팀만 예약받는 미슐랭 3스타 셰프로 보면 되겠습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직접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 것도 그의 실력과 인기가 그만큼 뛰어났던 덕분입니다.‘너무도 뒤러다운’ 최후
안타깝게도 막시밀리안 1세는 뒤러가 초상화를 완성하기 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기사 앞머리에서 언급했던, 그의 손자 카를 5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됐습니다. 문제는 중간에 일이 꼬이면서 뒤러가 약속한 보상을 지급받지 못했다는 것. 호락호락하게 돈을 떼먹힐 뒤러가 아니죠. 그는 카를 5세의 대관식까지 찾아가 약속했던 돈을 기어이 받아내고야 맙니다.하지만 이 여행은 공교롭게도 뒤러가 죽음을 맞이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여행 중 뒤러는 근처 해안에 죽은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평생 내륙 지방에 살던 뒤러, 고래를 한번 보고 싶어서 헐레벌떡 달려가는데요. 도착해 보니 아쉽게도 고래는 파도에 떠밀려가 있었고, 너무 열심히 뛰어가서 그랬는지 열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 후유증에 계속 시달리다가 8년 뒤인 1528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뒤러의 유산은 미술사에 영원히 남았습니다. 화가들은 뒤러 이후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을 알리고 브랜드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뒤러가 선진 미술을 전파한 덕분에 독일을 비롯한 중북부 유럽에서 새로운 미술 사조가 꽃피기 시작했고요. 수준 높은 판화를 제작한 덕분에 유럽에서 시각예술이 대중화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 그림도 그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 토끼의 보슬보슬한 털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인상적인 수채화입니다. 521년 전 그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실적이지요. 워낙 잘 그려서 그런지, 토끼의 해인 올해 자주 보이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제가 오늘 뒤러의 이야기를 다룬 이유도 마찬가지로 이 그림 때문입니다. 내일이 토끼의 해 설날이니까요.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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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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