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년들이 다시 루쉰을 읽기 시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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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
루쉰의 단편소설 '쿵이지'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창백한 이 남자는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어요. 하지만 변변한 직업이 없죠. 할 줄 아는 거라곤 글을 읽는 것 뿐. 외상으로 낮술을 마시고 도둑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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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마다 "군자는…" 하는 걸 보면 글 깨나 읽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해요. 하지만 지금은 초라한 신세죠. 허름한 선술집에서 자리조차 못 잡고 서서 술을 마실 정도로 가난해요.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말을 들어보면, 쿵이지는 원래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출세하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처지가 됐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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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중국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향해 매서운 비판을 했던 것만큼이나 '혁신하지 않는 중국'에도 날선 비판을 합니다.
'아Q정전'을 쓴 루쉰은 중국 대표 작가죠. 하지만 그간 중국에서는 '언제 적 루쉰이냐'는 분위기도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루쉰의 시대적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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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년들이 쿵이지를 다시 집어든 건 학력 인플레이션과 실업난 때문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공부한 끝에 쿵이지처럼 됐다"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가 되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쓸데없이' 열심히, 많이 공부했다고 한탄하는 거죠.
오늘날 쿵이지들은 '학벌'이 낡은 장삼이 됐다고 말합니다. 과거, 중국의 급속 성장기에는 학벌만 좋으면 번듯한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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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중국의 3월 16∼24세 청년 실업률은 19.6%에 달했어요. 1∼2월(18.1%), 작년 12월(16.7%)보다도 높아졌죠.
리창 중국 신임 총리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취업은 민생의 근본으로, 취업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 방법은 경제 성장에 기대는 것"이라고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 리오프닝(경기 회복)에 대한 불확실성이 여전해요.
저성장 우려, 학력 인플레이션, 일자리 미스매치, 청년 실업, 그리고 터져나오는 청년들의 자조… 이런 풍경은 어쩐지 익숙합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한국 청년들이 떠오르지 않나요.
중국 내에서는 쿵이지의 역주행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중국 관영 방송인 중앙TV(CCTV) 인터넷판은 최근 '쿵이지 문학 배후의 초조함을 직시하라'는 평론을 싣고 이렇게 주장했어요.
"(소설 속) 쿵이지의 삶이 몰락한 건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지식인의 허세를 버리지 못하고 노동으로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뜻있는 청년들은 (쿵이지처럼) 장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청년들에게 '일단 장삼(학벌)부터 갖춰 입어라'고 부추겨온 어른들의 책임도 생각해볼 문제죠.
소설은 쿵이지가 행방불명 상태인 채 끝납니다. 선술집에서 일하는 '나'가 기억하는 쿵이지의 마지막 모습은 다리가 부러진 채 흙바닥을 기어와서 외상 술을 마시는 모습. 소설 결말은 이래요. "나는 지금까지도 끝내 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쿵이지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 같다."
중국 청년들도, 한국 청년들도 자신의 삶이 이런 결말을 맞기를 원치 않는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난 뒤 '언제 적 루쉰, 언제 적 쿵이지(또는 헬조선)냐' '그런 한탄은 이제 옛날 말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