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이 러시아산 디젤, 중유 등 정제 유류제품의 가격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선 지난달부터 가격 상한제를 시행하고 있고, 천연가스 상한제도 다음달 도입한다. 여기에 추가 규제를 하겠다는 얘기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다소 소강 상태지만 ‘에너지 전쟁’은 더 치열해지고 있다. 서방의 공세에 대응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에너지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전쟁 무기가 된 에너지

2차전지 핵심자원 보유국 '광물판 OPEC' 결성하나
푸틴 대통령은 개전 이후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을 무기로 활용했다. 서방의 제재안에 맞서기 위해서다. 2021년까지 EU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비중은 40%에 달했다. 러시아는 작년 9월 EU로 자국산 가스를 실어나르는 송유관 노르트스트림을 닫아버렸다.

미국 공영라디오방송 NPR은 “유럽이 겪는 에너지 대란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 달 뒤 원유 감산 결정을 내렸다. OPEC+ 회원국인 러시아를 돕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 결과 유럽의 지난해 기준 주거용 가스 및 전기 비용은 2000~2019년 평균치보다 각각 144%, 78% 높아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 전쟁 도중 총칼에 맞아 사망하는 군인보다 푸틴의 에너지 무기화로 사망하는 민간인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에너지 전쟁은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조업체들에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의 불안정한 에너지 상황은 미국의 자국 산업을 키우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과 맞물려 유럽 기업들의 탈출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에너지 대란 우려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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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번 겨울 천연가스 등 에너지 가격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기온이 평년보다 따뜻한 데다 EU가 천연가스 비축량을 늘리면서 준비한 덕분이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봄 이후 에너지 상황을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서방의 가격 상한제가 러시아의 생산을 줄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서다. ‘제로 코로나’를 폐기한 중국도 변수다. 지금은 확진자 급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본격적인 경제 활동 재개가 이뤄지면 에너지 소비량이 크게 늘면서 가격이 급등할 수 있다.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수입을 못하게 된 유럽 국가들이 액화천연가스(LNG)를 대량 구매하는 것도 가격 불안 요인이다. 싱크탱크 뉴아메리칸시큐리티의 에너지 전문가 레이첼 지엠바는 “지난 6개월간 시장에 나온 LNG를 사실상 유럽이 싹쓸이했다”며 “가스 입찰 전쟁이 벌어지면서 가난한 나라들은 LNG를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자원 전반의 무기화도 가속화될 조짐이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세기에는 석유가 가장 중요했지만 21세기에는 핵심 광물 확보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로 이용하는 것을 지켜본 중국이 서방 제재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희토류 등을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니켈과 리튬, 코발트 등 2차전지 핵심 자원 보유국인 인도네시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광물판 OPEC’을 결성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