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K팝만으론 '문화강국' 못 된다
월드컵 개막식을 시청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후 처음이었다. 월드컵 공식 음악을 BTS 멤버 정국이 부른다는 소식에 TV 앞에 앉았다.

그 나라 예술 실력을 전 세계에 뽐낼 절호의 기회를 왜 한국 가수에게 넘겼는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조용했던 스타디움은 정국의 등장과 함께 환호로 뒤덮였다. 세계인의 눈과 귀를 카타르로 돌려세우는 데(그것도 호의적으로), 이만한 카드가 없다는 걸 카타르는 꿰뚫어 본 것 같다.

대중문화는 '글로벌 톱' 됐지만…

뿌듯했다. K팝의 위상이야 알고 있었지만, 남의 나라 월드컵을 접수할 정도인지는 몰랐다. 카타르 현지를 취재한 기자는 “BTS와 오징어게임 덕분에 어디를 가든 대접받았다”고 했다. 그렇다. 대한민국을 ‘매력 국가’로 일으켜 세운 일등 공신은 단연 대중문화다. 멋들어진 춤과 노래에 재미있는 스토리가 더해진 K콘텐츠에 세계는 흠뻑 빠져들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 앞에 ‘문화강국’이란 수식어를 써도 되지 않을까. 요 며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의외였다. 다들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가로젓는 사람이 더 많았다. 순수예술이 약하다는 게 이유였다. 클래식 음악, 미술, 문학 등 ‘뿌리’(순수예술)가 약해 ‘열매’(대중문화)는 언제든 시들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IT(정보기술)·반도체 강국’이지만 기초과학이 약한 탓에 ‘과학 강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대중문화에서 거둔 성과와 비교할 때 순수예술 성적표는 초라하다. 뛰어난 예술인이 더러 나왔지만, 오랜 세월 검증받은 ‘거장’은 드물다. 그 기반도 두터운 편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는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앞뒤가 바뀐 ‘헛발질 정책’을 꼽는다. 문화강국이 되려면 ‘수요자’(국민)들이 순수예술과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 일부터 해야 한다. 악기와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 늘고, 공연장과 전시장이 ‘어른들의 놀이터’가 돼야 순수예술에 돈이 돌며 재능 있는 사람이 몰린다.

공연장·미술관 더 지어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이런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대신 가난한 ‘공급자’(예술인)에게 현금을 주는 손쉬운 방법만 쓴다. ‘물고기 잡는 법’이 아니라 ‘물고기’를 건네는 셈이다. 이러니 악기와 그림을 배울 곳은 안 보이고, 꼭 봐야 할 ‘대작’ 공연과 전시는 가물에 콩 나듯 나온다. 그사이 예술가들은 더 가난해진다.

서울 인구 100만 명당 박물관·미술관 수는 17개(2020년 기준)다. 프랑스 파리(149곳)의 9분의 1이다. 그나마 세계적인 명화를 전시할 만한 시설과 학예조직을 갖춘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리움미술관 등을 손에 꼽을 수 있다. 클래식 공연도 마찬가지다. 똑 부러진 음향 시설과 넉넉한 좌석을 갖춘 곳은 예술의전당과 롯데콘서트홀 정도다. 적은 공연 수는 티켓값 상승을 낳고, 안 그래도 높은 클래식 문턱을 더 높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 국가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과 국민의 문화 눈높이를 감안할 때 문화 인프라는 태부족이다.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같은 시설이 우리 곁에 있다면, 국민 행복지수가 한 뼘 정도는 높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