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왜, 언제나, 정치는 경제를 망치나 <上>
정치는 본질적으로 비(非)시장적, 아니면 반(反)시장적이다.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지배하려고 한다. 시장은 기업의 탐욕과 소비자의 욕구를 질서정연하게 삭감하지만 권력은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시장 침탈에 대한 정치적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합리와 신뢰를 기반으로 이뤄진 자원 배분은 권력 앞에서 간단히 헝클어진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시장은 자폭으로 저항한다. 피해는 시장 참여자 모두의 것이다.

레고랜드는 민간기업 같으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사업이다. 착수한 지 11년 여에 걸쳐 사업 계획이 계속 축소되고 뒤틀리면서 경제성이 크게 떨어진 데다 사업구조도 합작사인 영국 멀린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짜여 불공정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최문순 전 강원지사의 치적 욕심이 작용했다고 본다. 김진태 현 지사가 레고랜드 운영사인 강원중도개발공사를 부도낸 것은 그 자체로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더욱이 호텔, 리조트, 컨벤션센터, 상가 등을 건설하는 데 1조원 이상을 추가 투입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김 지사는 중요한 수순을 놓쳤다. 기업회생 신청을 하기 전에 중도개발공사가 발행한 2050억원 상당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먼저 상환했어야 했다. 강원도의 지급보증이 없었더라면 아무도 사지 않았을 채권이다. 그는 강원도에 대한 시장과 투자자들의 믿음을 무참하게 저버렸다. 신용도가 높은 기업조차 아슬아슬하게 걷던 시장 살얼음판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강원도 단위의 결정이 금융시장에 이런 결과를 불러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배경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김 지사가 전임자의 평판에 흠집을 내기 위해 의도적 ‘빅배스’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필자의 생각도 비슷하다. 냉정하게 정리했어야 할 사업에 전임자 망신 주기라는 계산을 작동시킨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과거 성남시장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이 대표는 돌연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방자치단체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대엽 전임 시장의 방만한 운영으로 재정난이 심각한 만큼 판교 신도시 사업을 위해 빌린 자금을 갚기 어렵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 시장은 이런 식으로 전임 시장의 흔적을 치밀하고 집요하게 지워나가면서 정치적 주목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김 지사나 주변 참모들이 채권시장 상황을 알았겠느냐는 생각도 든다. 민생을 입에 달고 살아도 시장의 작동원리를 알고 있는 정치인은 극소수다. 정치적으로 눈에 보이는 서민 대출금리는 챙기면서도 그 이자율이 적자국채 금리 상승과 연동돼 있다는 사실은 모르거나 모른 체한다. 레고랜드 사태가 몰고 온 채권시장 패닉은 올 들어 한국전력이 발행한 채권이 무더기로 시장에 쏟아지는 상황과 연결돼 있다. 연간 최대 40조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예상되는 한전은 올 들어 23조원이 넘는 채권을 발행했다. 지난해(10조3200억원)의 두 배, 2020년(3조4200억원)의 일곱 배가 넘는 규모다.

엄청난 물량을 쏟아내면서 발행금리도 급등하고 있다. 신용등급은 국가신용등급(AAA)과 같은 수준이지만 2년물 기준 금리가 연 5.99%까지 치솟았다. 이제 웬만한 대기업은 무조건 연 6% 이상의 금리를 부담해야 하는 질서가 만들어졌다. 한전이 막대한 적자에 봉착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무모한 탈원전과 여야 가릴 것 없이 전개된 정부의 전기요금 억제 때문이다. 2017년 5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냈던 한전은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한 2018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무려 29조원 상당의 손실을 냈다. 전기요금은 놀랍게도 2013년 11월 이후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한전이 필사적으로 매달린 연료비 연동제는 철저히 무력화됐다.

연말이면 50조원 안팎에 이를 누적적자와 180조원 상당의 부채를 어떻게 감당할 건가. 전기요금을 왕창 올리거나 고금리 채권 발행을 늘려 버티는 수밖에 없다. 연간 이자만 2조원에 육박할 판이다. 한전을 부도낼 수는 없는 만큼 모두 국민 부담이다. 이념에 사로잡힌 탈원전과 민생이라는 이름의 전기료 억제는 처음부터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기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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