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 분야에서 빨간색(레드)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증권 시장에선 '상승'의 색이지만 경제에 부정적인 사건이 터졌을 때 '빨간 불이 켜졌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면 좋은 쪽이든 아니든 무언가 주목해야 할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레드북에선 미래 한국 경제에 영향을 끼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를 추적합니다.


“팬데믹 기간 중 효과를 입증했던 (일자리 보전 정책 등) 재정 정책들이 해당국의 역량이나 재정 여력에 따라 영구적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런 정책 정책들은 정부를 상당한 재정 위험에 노출시키기에 더 심각한 위기에 대비해 남겨둬야 한다.”

비토르 가스파르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지난 12일 IMF블로그 올린 ‘재정정책은 사람들이 생계비 위기에서 탈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이 같이 밝혔습니다.

가스파르 국장은 포르투갈 재무장관 출신으로 2014년부터 IMF 재정국을 맡으며 전 세계 국가들의 재정 상황을 분석하는 보고서인 ‘재정 모니터(Fiscal Monitor)’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4월과 10월 두 차례 발표되는 재정 모니터에는 IMF의 현실 진단과 바람직하다고 판단하는 정책 방향이 담겨있어 각국 재정 당국들은 보고서에 담긴 IMF의 메시지를 자국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곤 합니다.

재정지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듯한 제목과 달리 논평의 핵심 줄기는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는 재정지출을 지양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가스파르 국장은 “장기간의 공급 충격과 광범위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정부는 가격 통제, 보조금 또는 감세를 통해 가격 인상을 제한하려고 해선 안된다”며 “그런 움직임은 예산 부담을 가중시키고 궁극적으로 효과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며 긴축재정을 권고했습니다.

IMF가 긴축재정을 권고하는 이유는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할 경우 경제가 더 큰 침체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서 입니다. 가스파르 국장은 “(재정지출 증가가 수요 압력을 높이면) 중앙은행은 이자율을 훨씬 더 높이게 되고, 정부 부채 상환 비용은 더 늘어난다”며 “긴축재정은 정책 입안자들이 인플레이션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경기 침체의 피해를 가장 먼저 받는 취약 계층에 대한 재정지출은 ‘예외’란 게 IMF의 생각입니다. 그는 “국가들은 선별적인 지원을 통해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것을 정책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며 “저소득 가구를 대규모 실질 소득 감소로부터 보호하고 음식과 에너지 등 필수재에 대한 접근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일단 큰 틀에서 IMF는 분명히 '긴축 재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기조 속에 에너지와 식량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지만, 경제 전반의 인플레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보조금이나 감세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와해라는 공급측 요인이 커 언제 안정화될지 불분명한 현재의 인플레이션 특성을 감안하면 정책 대상이 광범위하고 경직성이 큰 재정 정책은 중장기적으로 재정을 악화시킬 것이란 게 IMF의 생각입니다.

이는 재정지출은 취약 계층 지원에 집중하고 국민 일반에 대해선 인플레이션 충격을 어느 정도는 용인하고 시장 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뜻으로로 풀이됩니다.

가스파르 국장의 논평에서 의미 심장한 부분은 ‘재정 정책을 펼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나라가 가진 펀더멘탈이나 재정 여력에 달려 있다’는 얼핏 보면 당연한 문장입니다. 가스파르 국장은 “팬데믹 기간 중 유럽연합(EU)이 시행했던 일자리유지계획(근로시간을 줄이는대신 급여 차액을 정부가 지급하는 정책)은 개인 소득 손실의 40% 이상“을 안정화해 효과성을 입증했다”며 “기업에 대한 재정 지원도 위기 국면에서 광범위한 파산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유사한 정책을 펼치는 것에 대해선 “팬데믹 기간 중 효과성을 입증한 재정 도구들은 해당 국가의 역량이나 재정 여력에 따라 더욱 영구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면서도 “(EU의 일자리유지계획이나 기업 파산 방지 지원 정책 같은) 지원은 정부를 상당한 재정 위험에 노출시키므로 심각한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당연하게 용인됐고,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던 정책이라도 ‘지금’은 용인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재정 지출 확대와 대규모 감세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나섰던 영국 정부에 대해 IMF가 내놨던 권고를 보면 가스파르 국장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 정부가 경제 활력 제고를 위해 내놓은 450억파운드 규모의 감세안과 재정지출 확대 계획에 대해 IMF는 9월28일 “영국의 높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려할 때 이 시점에서는 선별적이지 않은 대규모 재정지출을 권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내 정책 제고를 촉구했습니다. 이어 IMF는 “재정정책은 통화정책과 교차 목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논평에 담긴 메시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적입니다.

결국 14일 영국 정부는 법인세율 동결을 포함한 감세안 전반을 철회하기로 했습니다. 영국의 국내총생산(GDP)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2020년 기준 140%에 달할 정도로 높고, 최근 브렉시트에 따라 불안정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6위 경제 대국이자 금융 강국인 영국이 자신들 마음대로 정책을 펼치지도 못했다는 점은 충격적입니다.

다행히도 IMF에 따르면 한국의 GDP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올해 말 54.1% 수준으로 35개 선진국 평균(올해 기준 77.1%)과 비교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총재도 지난 14일 추경호 부총리를 만나 “한국은 정부 부채가 낮아 강력한 기초 체력을 보유하고 있고 외환보유액, 경상수지도 양호한 편”이라고 평가한 것을 보면 영국에 비해선 정책 여건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영국은 여전히 달러, 유로에 이은 세계 3대 통화인 파운드화를 발행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낙관하긴 힘듭니다. 재정모니터 보고서에 따르면 선진 35개국 중 향후 5년 간 일반정부 부채 비율(국가부채+비영리공공기관 부채)이 늘어나는 국가는 한국 포함 12개국에 불과합니다. IMF는 한국의 정부 부채 비율이 2027년 57.7%로 불어날 것으로 바라봤습니다. 정부 부채 비율이 오르는 12개 국가 중에서도 5번째로 높은 상승폭입니다.

한국의 정부부채 비율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급속한 고령화에 따라 연금이나 의료 관련 정부 지출이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추세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이미 1970년대 65세 노인인구 비율이 14%를 넘기며 고령 사회에 진입한 나라입니다. 2017년 고령 사회에 진입한 한국은 영국보다 50살은 젊은 셈이니 당장 이런 나라들이 겪는 문제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고령사회에서 노인인구 비율 20% 이상인 초고령사회로 이행하는데 영국은 50년,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습니다. 어쩌면 이미 바닥을 찍은 듯한 영국에 비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 한국이 더 위기감을 느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한국을 대표해 IMF에 나가있는 허장 IMF 상임이사도 최근 기자들을 만나 “사실 우리가 (IMF등 국제사회에) 가장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 고령화”라고 얘기했습니다. 고령화가 되면 사회 전체가 항상 루틴(정형화된 습관)만을 따라가는 활력 없는 사회가 되고, 이는 경제 지표에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미 국제 사회는 한국의 고령화 추세를 주목하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입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