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경과 전문의가 전하는 위험한 '심인성 장애'들
불가사의한 질병 이야기…신간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스웨덴의 소도시 혼달에 사는 놀라는 1년 반째 잠만 자고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고, 입술은 색이 거의 없는 연분홍빛이었으며 두 손은 배 위에 포개져 있었다.

의학적 관점에서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혈압도, 뇌파도 정상이었다.

코에 꽂아 뺨에 테이프로 고정해 놓은 영양관, 바지 안에 채워진 기저귀만이 그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의료진은 놀라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어떤 행동에 대한 욕구도 없는 상태라고 진단하며 이를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이라고 밝혔다.

체념증후군은 아무에게나 생기는 증상은 아니다.

유독 망명을 원하는 가족의 자녀들이 이 병에 걸린다.

스웨덴에서만 난민 수백 명이 이 같은 잠에 빠져 수년째 깨어나지 않고 있다.

이 증후군은 아주 특정한 집단에서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구소련과 발칸 반도 출신의 아이들과 박해를 받은 야지디족과 위구르족 난민들이 이 병에 많이 걸린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온 난민들은 이 질병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신경과 의사인 수잰 오설리번은 최근 번역돼 출간된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한겨레출판)에서 체념증후군은 "특정한 집단에서 발생하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이라며 "외부적인 요인들이 아이들 뇌에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강제 추방을 앞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그러면 생리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자극해 신체적인 증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적 환경은 병의 발달과 관련해 심리적·생물학적 관점에 비해 너무나 오랫동안 등한시되었다"며 "이런 장애를 일으키는 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한 시각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불가사의한 질병 이야기…신간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저자는 체념증후군 외에도 사회적 환경 등이 병에 영향을 주는 여러 질병을 소개한다.

스웨덴에서 출발한 저자는 미국, 쿠바, 카자흐스탄, 콜롬비아까지를 돌며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심인성 장애의 종류와 증상을 전한다.

심인성 장애란 어떤 병이나 증상 등이 정신적·심리적인 원인에 의해 생기는 질환을 말한다.

예컨대 니카라과 미스키토인들은 '그리지시크니스'라는 증상에 시달린다.

십 대 여자아이들이 겪는 환각과 환시를 동반한 병이다.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섬뜩하게 생긴 낯선 이가 찾아와 자신을 데려가려 한다고 얘기한다.

그리지시크니스 증상을 보인 환자들은 서너 명의 장정보다 힘이 세진다.

경련하고, 거품을 물며 자기 옷을 찢고 미친 듯이 달려간다.

심지어 유리를 깨 먹기도 한다.

이 상태가 되면 환자의 안전을 위해 감금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저자는 "질병에 대해 문화적으로 형성된 개념 역시 신체화할 수 있다"며 "문화는 정상적 혹은 비정상적 신체 변화에 대한 반응을 결정할 뿐 아니라 고통을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할 가장 좋은 방식 역시 결정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외에도 카자흐스탄의 쇠락한 도시에서 발생한 집단 수면증, 어느 날 기이한 소리를 들은 후 집단 두통에 시달린 쿠바의 미국 대사관 직원들, 집단 히스테리를 보인 미국과 가이아나 여학생의 집단 발작 등 심인성 장애의 여러 가지 사례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신경학적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의 3분의 1은 심인성 증상을 보인다"며 "정신이 몸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고 말한다.

서진희 옮김. 392쪽. 1만9천원.
불가사의한 질병 이야기…신간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