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가업 통해 국악기 접하다가 중학교 마친 뒤 제작자 입문
해금·아쟁·거문고 등 현악기 통달…고대악기 복원 기술 일인자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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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오동나무와 함께한 세월이 반백년에 가깝다.

눈과 비바람을 호되게 맞고 뙤약볕을 견뎌낸 오동나무가 최고의 가야금 울림통이 되듯 그의 얼굴에는 인고의 세월이 묻어났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조선의 난계 박연이 태어난 충북 영동군 심천면.
국악의 향기가 은은하게 흐르는 이곳에 충북 무형문화재 제19호(악기장) 기능보유자인 조준석(61) 장인의 공방이 있다.

아름드리 오동나무를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해 울림통을 만드는 조 장인의 얼굴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나무를 자귀로 내리치고 대패로 깎아내는 그의 손길은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두께가 미묘하게 차이 나도 소리를 달리 내는 탓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가야금에 걸린 12줄의 현, 해금 울림통에 연결된 2줄의 현에서도 미세한 떨림, 애절한 소리를 읽어내는 장인의 숨결이 묻어났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타이틀을 거머쥔 게 어찌 보면 그에게는 정해진 운명이었을 듯싶다.

조 장인은 1961년 전북 장수에서 국악기를 만들던 집안의 7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게 안족(雁足)이에요.

현을 괴어 소리를 고르는 기능을 하는데 기러기발이라고 불러요.

방안에 흔하게 굴러다녀 장난감 삼아 놀았죠. 남들은 한 번 접하기도 어려운 걸 저는 어릴 때부터 흔하게 봤죠"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그는 1977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해 넷째 형인 조대석 장인이 운영하는 국악기제작사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넷째 형은 1950년대 가야금 제작 명인인 백옥기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뒤 2년 전 작고할 때까지 평생 국악기를 제작한 삼촌 조정삼 장인을 사사했다.

그 계보가 조준석 장인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려서부터 국악기 제작 과정을 직접 보며 자란 그는 소질이 남달라 3∼4년 만에 두각을 나타냈고 1985년 독립해 광주에 '남도국악사'를 차렸다.

그가 만든 국악기는 소리가 청아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조 장인은 2000년 심천면으로 둥지를 옮겨 22년째 이곳에서 살고 있다.

2009년 6월에는 충북 무형문화재 악기장 기능보유자가 되는 명예도 안았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조 장인은 가야금, 거문고, 해금, 대금, 아쟁 등 못 만드는 현악기가 없는데, 특히 가야금과 해금 제작에 능하다.

20년 이상 자란 아름드리 오동나무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내고 그 위에 12현을 얹는 정악가야금, 오동나무와 밤나무로 앞판과 뒤판을 만들어 붙인 산조가야금 제조 실력 모두 탁월하다.

원통 모양의 울림통에 대나무 기둥을 꽂아 현을 올린 해금 역시 그의 전문 분야다.

해금과 가야금의 기본 재료는 대나무 뿌리와 오동나무, 밤나무인데, 그의 창고는 웬만한 제재소보다 규모가 크다.

20년 이상 자란 오동나무를 켜 만든 두꺼운 판자, 기러기발을 만들 때 쓸 느티나무와 돌배나무, 호두나무를 5년 이상 건조하며 진을 빼는 곳이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그는 "30년 전부터 돈만 생기면 재료를 샀다"며 "제자 6명과 함께 가야금과 해금을 만들어도 100년은 쓸 수 있는 분량"이라고 뿌듯해했다.

고대 전통악기를 복원하는 능력은 출중하다.

1997년 국립광주박물관이 기원전 1세기경 철기시대 유적 분포지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절반만 남은 울림통을 발굴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 장인은 국립광주박물관으로 달려갔다.

그는 학계 연구결과를 근거로 벚나무를 이용, 2005년 10현 가야금을 복원해 국악계를 놀라게 했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이듬해에는 대전시 월평동 유적 목곽고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양이두,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 유적 저수지에서 나온 고구려 요고(작은북) 복원사업에도 참여했다.

1천400년 전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오(五)악사의 악기 다섯 개도 복원했다.

완함, 백제고, 백제금, 백제적, 소로 명명된 이 악기는 국립중앙어린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유물전시관에서는 조 장인이 거문고 파편으로 탁본을 뜬 후 복원한 거문고를 볼 수 있다.

문헌과 전통악기 전문가의 의견을 얻어 신라 때부터 사용됐던 향비파를 복원한 일도 있다.

그러면서 조 장인은 고대악기 복원 기술의 일인자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했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국악기 제작·전수는 물론 거문고, 가야금, 해금 개량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전통 가야금은 12줄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서양악기와 협연이 가능하도록 만든 15·18·20·25현 가야금은 그의 대표적인 개량 작품이다.

소리를 쉽게 고를 수 있도록 기타처럼 조율기를 단 가야금을 만들었고, 규격을 작게 한 학생용 악기도 개발했다.

조 장인은 국악기의 저변 확대에도 힘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전국 곳곳의 교육기관·단체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국악기를 기증했고 학교 학예활동도 지원했다.

[충북 장인열전] 열두줄 가야금소리 이끌린 45년…조준석 악기장
2008년부터는 이틀 일정의 동호인 경연대회를 열고 있고 사비를 들여 국악기 제작체험 축제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일본 시마네현 야스기시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프랑스 낭트에서 초청 전시회를 열어 국악기의 우수성을 홍보했다.

조 장인의 꿈은 초등학생들이 누구나 국악기 하나쯤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 것에 관심을 둬야 국악도 활성화될 수 있다"는 지론의 그는 "학생들이 편하게 쓰도록 악기를 꾸준히 개량하면서 '전통악기 교육'이 의무화되는 날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