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대통령이 평양 공동선언과 9·19 군사합의 4주년을 맞아 “정부가 바뀌어도 (남북 간 합의는) 마땅히 존중하고, 이행돼야 할 약속”이라고 했다. 국회 한반도평화포럼이 주최하는 기념토론회를 하루 앞두고 어제 공개된 서면 축사를 통해서다. 9·19 군사합의란 2018년 정상회담을 한 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무장지대 등에서 군사적 적대관계를 끝낸다며 마련한 합의서다.

문 전 대통령은 축사에서 군사합의에 대해 “군사적 위험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실천적 조치였다”며 “전쟁 없는 한반도의 시작을 만방에 알렸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이행강제력 하나 없는 공수표임이 이미 확인됐다. 국제사회에 약속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유예를 스스로 파기하고, 지난 3월 화성-17형으로 추정되는 ICBM 도발을 감행했다. 문재인 정부 5년간 지속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이름의 대북정책이 결국 평화를 가장한 쇼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신뢰, 대화, 평화를 얘기하며 북한에 핵전력 고도화를 위한 시간만 벌어줬다. 이런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는 남북 합의의 존중을 강조하며 후임 정부에 훈수를 둘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북한은 공격이 의심되기만 해도 핵 선제 타격을 불사하겠다고 나선 판이다. 핵무력 법제화라는 겉치레뿐인 절차와 방식을 마련해 군사적 불안을 더욱 획책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남북 합의를 존중하라는 것은 북한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제 영국 등 순방길에 오른 윤석열 대통령은 “북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핵우산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미국과 함께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주말엔 한·미 양국이 4년 만에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회의를 열고 “전례 없이 압도적이고 결정적으로” 북핵 위협에 대응할 것을 합의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포함한 평화 구축의 유일한 길은 이런 동맹의 결속과 군사력 우위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