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부 떠나 제주 역사·문화 연구에 중요한 기틀
탐라국(耽羅國) 개국 신화를 보면 고·양·부(高·梁·夫) 삼성(三姓)의 시조인 고을나·양을나·부을나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나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제주의 옛 이름이자 국가인 '탐라'의 시작을 보여준다.
백성이 불어나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탐라국 중심지에 '성'(城)이 있었을 것이다.
탐라의 최고 권력자가 섬을 통치했던 탐라국의 옛 성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 탐라국의 옛 자취
삼국사기와 신당서, 고려사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탐라국은 고구려·백제·신라와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된 관계 속에 교역했고, 심지어 바다 건너 일본이나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이를 입증할 만한 유물이 발견됐는데, 1928년 제주 산지천 하류 산지항(제주항) 축조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중국 한대(漢代)의 유물이다.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등 중국 화폐와 청동으로 만든 거울 등이었다.
오수전은 기원전 118년부터 약 900년에 걸쳐 사용됐는데 한국, 일본, 인도차이나반도 등에 걸쳐 두루 쓰이던 국제적인 무역 화폐였다.
탐라국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탐라국은 고려시대(918∼1392)에도 이러한 대외 관계를 유지하며,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1105년 고려 숙종 10년에 고려의 행정구역인 '탐라군'(耽羅郡)으로 편입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잃었다.
탐라국은 고려에 편입되기 전까지 어엿한 독자적인 국가의 면모를 갖추며 성장했다.
해상무역을 통해 상인과 사신 등 외지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만큼 혹시나 모를 주변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아 백성을 보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을 언제 언제 어디에 축조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를 추정할 만한 문헌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초기 태종실록을 보면 1416년 태종 16년에 제주도안무사 오식 등이 제주를 3개의 행정단위 즉,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으로 나눌 필요성을 왕에게 건의하는 기록이 나온다.
기록 중에 '제주에 군(郡)을 설치하던 초기에 한라산의 사면이 모두 17현(縣)이었습니다.
북쪽(北面)의 대촌현(大村縣)에 성을 쌓아서 … (중략) … 방어했고'라는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고려 숙종 때인 1105년 탐라국이 탐라군으로 편입되던 초기, 제주의 중심지였던 북쪽 대촌현에 이미 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외에도 '신동국여지승람'에 '주성(州城) 서북쪽에 옛 성터가 있다'는 기록이, '남환박물'에도 '제주성 서북쪽에 고성(古城)의 터가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상 옛 성터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무근성'이라 불리며 제주시 삼도2동의 실제 지명(도로명)으로 남아있다.
'무근성'이란 이름은 '묵은성'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데서 비롯됐다.
'오래된' 또는 '일정한 시일이 지난'이란 뜻의 '묵다'란 단어에 '성'(城)을 결합해 만든 '묵은성'은 쉽게 말해 조선시대 개·증축한 '제주읍성'보다 '오래된 성'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묵은성이 탐라국의 옛 성일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제주성의 개념을 일단 탐라국의 옛 성과 조선시대의 '제주읍성'으로 나눠 표기한다.
◇ 탐라 옛 성이 무근성이었을까?
오늘날 연구자들은 과거 문헌기록 등을 토대로 탐라국의 옛 성의 위치와 그 축조 시기, 조선시대의 제주읍성과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2011년 한국사진지리학회지에 실린 '조선시대 이전 탐라국 중심 마을의 형성과 변천' 논문에서 김일우는 "무근성 일대 성(城)의 축조 시기는 (중략) 한반도 육지부의 삼국과 아울러, 일본 및 중국 지역과도 자율적으로 교역을 행하던 탐라국시대에 해당하는 5∼7세기 후반 무렵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 "무근성 주변의 성은 조선 태종 11년에 보수가 이뤄진 적이 있었던 제주 읍성의 성곽으로 계속 활용되기도 했다"며 "성의 공간적 범위가 동쪽은 산지천 서안, 서쪽은 병문천 동안을 각각 경계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태종실록에 태종이 1411년 '제주의 성을 수축(修築, 헐린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하도록 명했다'는 기록 등에 따라 조선시대 제주읍성은 탐라국의 성곽을 이용하는 선에서 개축과 증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변성훈은 '제주읍성의 변천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2015) 논문에서 탐라국의 옛 성과 달리 조선시대 제주읍성은 새롭게 지어진 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신동국여지승람'과 '남환박물'의 기록 외에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고주성(古州城)은 주성(州城)의 서북쪽에 그 터가 있으니 마을의 이름을 진성(陳城)이라 칭한다'고 기록한 내용을 참고해 "무근성이 있던 곳을 '진성동'(陳城洞)이라고 표기한 것은 '陳'의 뜻이 '묵은 또는 오래된'이므로 '진성'은 무근성 또는 오래된 성 즉, 고성(古城)이라 풀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조선시대 제주읍성 축성 이전에 이미 오래된 성, 무근성이 있었고, 이는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이었다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다"며 "무근성이 조선시대 제주읍성의 서북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조선시대의 제주읍성은 무근성의 동남쪽에 새로 쌓은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옛 지도에도 '진성'이 나타나 있다.
18세기 초 제작된 '제주목도성지도'를 보면 제주읍성 북서쪽 바닷가 인접한 곳에 '진성'(陳城)이라 표시돼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들 연구자는 무근성이 탐라국의 옛 성이라는 기본전제를 같이 한다.
반면, 언론인 출신인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자신의 저서 '일곱개의 별과 달을 품은 탐라왕국'(2017)을 통해 무근성이 탐라국의 옛 성이 아닐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어 탐라국의 옛 성이 제주읍성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선 "고성(古城, 무근성)을 (탐라국의) 옛 성이라고 본다면 먼저 제주읍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일도·이도·삼도는 옛 성이 수축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모두 이설됐다는 가설이 성립돼야 한다.
그러나 태종 임금은 '옛 성을 수축하라'고 했지, 다른 지역으로 이설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묵은성이 탐라국의 옛 성이라면, 해당 지역에 탐라시대 형성된 '대촌'의 흔적 등 대규모 취락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의미한 단서가 발견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성곽은 안에서 밖으로 확장되는 속성을 갖고 있다"며 "(탐라국의) 옛 성은 조선시대에 수축된 제주읍성 안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탐라국의) 옛 성을 제주읍성 서북쪽에 있는 고성으로 지목해온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며 "기록에 집착한 나머지 옛 성으로서 갖춰야 할 일도·이도·삼도와 성주청은 물론 탐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성대 등을 도외시한 탓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각기 다른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탐라국 옛 성의 자취를 조명하는 일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제주성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