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실리콘밸리…혁신 이끈 '창업 영웅'들 잇달아 퇴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거둔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달러 이상인 스타트업) 창업주들이 잇따라 퇴진하고 있다. 주식시장이 침체하고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관리형 전문 경영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낙마하는 실리콘밸리 영웅들

비정한 실리콘밸리…혁신 이끈 '창업 영웅'들 잇달아 퇴진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실리콘밸리의 젊은 왕들이 유니콘에서 낙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들의 사임은 지난 10년 동안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가치 있고 잘 알려진 회사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이미지를 수집하는 온라인 서비스 핀터레스트의 공동창업자 벤 실버맨이다. 그는 2010년 핀터레스트를 창업한 뒤 12년간 최고경영자(CEO)로 활동했지만 지난 6월 사퇴 의사를 밝혔다. 숙박공유업체 에어비앤비의 공동창업자 조 게비아도 지난달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배달 스타트업 인스타카트의 아푸르바 메타는 올해 안에 기업공개(IPO)를 마치면 CEO직을 내려놓겠다고 발표했다. 공동생활 공간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커먼의 창업자 브래드 하그리브스는 이달 초 CEO 자리에서 물러나 최고창조책임자(CCO) 직위를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변화는 지난해 말 시작됐다. 잭 도시 트위터 창업주가 CEO 자리를 지난해 12월 파라그 아그라왈에게 넘겨준 것이 신호탄이었다. ‘피트니스계의 넷플릭스’로 불리던 홈트레이닝 업체 펠로톤의 공동설립자 겸 CEO인 존 폴리도 물러났다. 후임으로는 배리 매카시가 선임됐다.

시장에서는 이들의 퇴진을 반기는 분위기다. 실버맨이 사임하고 레디가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핀터레스트 주가가 뛰었다. 사임 소식이 알려진 지난 6월 28일 핀터레스트 주가는 시간외거래에서 4%가량 올랐다. 폴리가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난다고 밝히자 펠로톤의 주가는 전날보다 25.28% 급등했다.

경험 많은 ‘전시 경영인’ 선호

비정한 실리콘밸리…혁신 이끈 '창업 영웅'들 잇달아 퇴진
업계에선 실리콘밸리가 카리스마형 ‘창업자’ 대신 안정적인 경영인을 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옛 페이스북) CEO는 이전 시대의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경영인 중 한 명이다. IPO를 위해 만난 투자자들과의 미팅에서 양복 대신 후드티를 입었다. 기술기업 창업자는 곧 ‘혁신’과 ‘변혁’의 아이콘이었고 입김도 강했다. 창업주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을 붙여 투자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기업 규모가 커져 투자금이 불어나도 CEO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투자자들은 마크 저커버그,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 등의 성공 사례가 잇따르자 스타트업에 장기투자를 결정했다. 신생기업에 투자하는 트레이스 코헨은 “(저커버그와 같은 기업가들의 모습은) 우리 세대 전체가 회사를 창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증시가 급격히 얼어붙고 경기침체 경고음이 울리면서 이런 트렌드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미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기술기업들은 악재에 직면했다.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경제로 특수를 누리던 기업들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기업 규모가 확대되며 투자자들의 입김도 세졌다. NYT는 “창업자들을 향한 투자자들의 인내심이 낮아졌다”며 “투자자들에게 창업자가 이끄는 회사는 ‘자산’이 아니라 ‘부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투자자들은 이들에게 비용 절감을 요구했고, 이어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전시(戰時) CEO’를 찾아나섰다는 것이 NYT의 분석이다. 펠로톤의 현 CEO인 배리 매카시는 세계 최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업체 넷플릭스와 음원 공유 서비스 스포티파이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이다. 핀터레스트를 맡은 빌 레디는 모바일 결제 서비스 페이팔을 거쳐 구글 커머스 사장을 맡았었다. 커먼의 하그리브스 뒤를 이은 CEO는 호텔업계의 베테랑인 칼린 홀로만이었다.

실리콘밸리 ‘아이콘’ 바뀔까

NYT는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스코드, 코인베이스 등의 설립자들도 투자자의 사임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로빈후드는 최근 월간활성이용자수(MAU)가 급감하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댄 돌레브 미즈호증권 애널리스트는 “몇몇 투자자가 로빈후드의 CEO 블래드 테네브를 보조하기 위해 ‘노련한 임원’을 영입하자고 비공개적으로 제안했다”며 “테네브 CEO는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일에는 매우 능숙한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창업자지만 (베테랑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홀로만 커먼 CEO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선 광범위한 경험과 운영 기술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다”며 “많은 설립자 CEO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고 밝혔다.

실리콘밸리 전성기를 이끌었던 일등 공신들이 완전히 물러났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영 악화와 스캔들로 물러났던 글로벌 오피스 공유 기업 위워크의 창업자 애덤 뉴먼은 최근 그가 창업한 아파트 공유 및 임대 사업 업체 플로가 실리콘밸리 유명 벤처캐퍼털 안드레센호로위츠(a16z)로부터 거액을 투자받으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a16z는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글로벌 기업을 이끈 사람이 과소 평가됐다”며 “우리는 창업자가 교훈을 통해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투자 이유를 밝혔다.

박주연 기자 grumpy_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