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점수 개인전·북서울미술관 '조각충동'·하이트컬렉션 '각'

최근 미술계에서 조각은 20세기 이전의 조각을 재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관측이 나온다.

과거의 조각을 참조하되 새로운 재료와 공법, 방법론 등을 통해 연대기적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목격된다는 것이다.

조각이 동시대 미술에서 갖는 의미와 조각의 변화 양상 등을 탐구한 중견과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잇달아 개막했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 나무에 어둠의 공간을 새기다…나점수 아트스페이스3 개인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아트스페이스3에서는 목조각으로 유명한 나점수(53) 작가의 작품 20여 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무명(無名)-정신의 위치'가 최근 개막했다.

작가는 나무를 가늘고 길게 파내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둠의 공간을 새겨 넣은 작품들을 선보인다.

길쭉하게 패인 홈은 나무 표면에 선으로 그어진 형상이 아니다.

먼저 홈을 파낸 뒤 홈의 양쪽 면을 깎아 패인 공간의 입체감이 드러난다.

양쪽 면의 두께는 목재의 수축과 팽창을 고려해 작품이 변형되지 않는 최소한의 범위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나점수는 전시장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이처럼 홈을 파는 것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비교하면서 설명했다.

"자코메티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저와 다릅니다.

자코메티의 조각은 흙을 붙이면서 동시에 뗍니다.

그리고 떼어낼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멈춥니다.

존재 자체의 가장 마지막에 남아있는 가느다란 형태에서 멈추는 겁니다.

저는 내부에 공간을 잡는데, 바깥에 얇은 판이 있어야 내부의 공간이 어둠의 무게로 옵니다.

"
작품명과 전시 제목에 쓰인 '무명'은 단순히 이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규정될 수 없는 것들'을 뜻한다고 한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작업 방식은 다르지만, 자코메티의 조각이 근원을 제시하듯이 나점수가 파낸 공간도 근원을 지향한다.

"물질의 내부로 진입해 붙잡을 수 없는 어둠의 선을 대면한다"는 작가는 조명이 닿지 않아 작품에 어둠이 생긴 부분을 "일종의 에고의 그림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나뭇결을 따라 체인톱을 수직으로 이동시켜 홈을 파낸다.

수공구가 아닌 전동공구를 사용하는 작업은 더욱 높은 집중도를 요구한다.

순간의 흔들림에도 체인톱이 튕겨 작품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작가도 크게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상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홈을 파는 행위는 에고가 시키는 것이고, 파고 들어가다 보면 벽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곳이 제가 사유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작가는 이번 전시에 수직의 이미지로 근원적 정서를 일으키는 작품 외에도 회화의 평면성을 반영해 벽에 걸릴 수 있는 조각들도 출품했다.

그는 "벽은 전업 작가로서 생활을 유지하게 해줄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 젊은 작가 17명의 실험들…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조각충동'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9일 개막한 전시 '조각충동'에는 젊은 작가 17명이 참여했다.

전통 조각의 '신체성, 이미지, 물질, 위상'을 새롭게 구성하는 동시대 조각들의 참신한 시도를 선보인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미술관은 과거부터 익숙한 조각과 닮아있지만, 기존과는 다른 내적 구성 논리를 가진 작품들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미술관은 "전통적 조각을 지지체 삼아 '조각이 무엇인지', '입체가 어떻게 의미를 발생시킬 것인지' 질문하고, 모바일 스크린이나 비대면 환경의 신체를 경유하는 동시대의 감각과 비평적 관점을 실어내는 것이 지금의 조각에서 선결 과제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시 작품들은 '조각이며 조각이 아닌 조각', '관계 맺는 조각', '이미지, 사물, 데이터, 위치로부터 탈주하려는 조각', '존재 조건을 재구성하는 조각'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구체적으로 강재원의 출품작 'S_crop'은 높이 5m의 기존 작품 '스우시'(Swoosh)를 3D 프로그램을 이용해 전시장 1, 2층을 관통하도록 배치하고 전시장 안에 포함된 부분만 잘라낸 것이다.

기존 조각은 물성을 고려해야 하지만, 작가는 3D 프로그램에서 콘크리트 건물에 개입하고 조각을 변형한다.

또한 공기주입식 소재를 사용해 공기가 빠지면 부피가 사라지고 2D의 껍데기만 남게 되는 '디지털 조각 방식에 의해 조형되는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는 8월 15일까지 열리며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

◇ 세계적 작가부터 신인까지…하이트컬렉션 조각 기획전 '각'
하이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하이트컬렉션에서는 7월 17일까지 조각 기획전 '각'이 열린다.

전시는 서도호, 이불 등 세계적 작가를 비롯해 Z세대 작가 홍자영(27) 등 12명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의 의미를 살펴본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작품들은 돌, 모래, 나무 등 자연 재료부터 아크릴, 아이소핑크, 스티로폼, 우레탄, 스테인리스 스틸, 콘크리트 등 산업적 재료까지 다양한 재료로 제작됐다.

또한 수제작부터 3D 프린트까지 여러 기술이 쓰였다.

이불의 '나의 거대서사: 바위에 흐느끼다…'(2005)는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열망들과 실패들, 작가의 사적 기억과 인식이 융합된 지형학적 서사를 구성한 설치 작품이다.

동시대 미술로서 조각의 의미는…중견·신진 작가들의 조각전
서도호의 '인과'는 토네이도를 떠올리게 하는 형상으로 하이트컬렉션의 전시 공간을 조성하면서 2008∼2009년에 걸쳐 제작됐다.

개인은 나약한 존재이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됐고, 집단을 이루면 토네이도처럼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