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게 현실적 엄마 연기' 호평…37년차 연극배우의 첫 TV 드라마
"죽은 다음에 존재감 부각…그게 엄마들의 삶인 것 같다"
'해방일지' 이경성 "밥상 앞에서 매일 조마조마…엄마의 일상"
힘겹게 들어 올린 김치통 속 포기김치를 썰고, 하얀 김을 내뿜는 압력밥솥에서 밥을 푼다.

각종 나물 반찬에 찌개와 국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차린 밥상 앞에 가족들을 한 명씩 불러 앉혀 놨는데, 분위기는 서먹함을 넘어 냉랭하기까지 하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는 남매들, 언제 폭탄 발언을 할지 모르는 아들 녀석, 이런 자식들을 심기 불편해하는 남편 눈치까지 봐야 하는 이는 바로 엄마다.

최근 종영한 JTBC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의 엄마 곽혜숙을 연기한 이경성(58)을 2일 서울 종로구 연합뉴스 사옥에서 만났다.

삼남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에서 엄마 곽혜숙이 차지하는 분량은 아버지 염제호(천호진 분)와 비교해도 많지 않다.

다 커버린 자식들은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남편은 힘들다는 푸념에 별다른 대꾸도 없다.

그래서 그저 매일매일 삼시세끼를 차려내고, 집안일에 밭일, 공장일까지 이 집안을 지탱하는 모든 일을 조용히 해낸다.

'해방일지' 이경성 "밥상 앞에서 매일 조마조마…엄마의 일상"
이경성은 "지금까지 제가 맡았던 엄마 역할 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엄마였다"며 "고된 삶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을 때가 많고, 자식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말투가 곱게 안 나오는 우리네 엄마"라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밥 먹을 때밖에 없는데, 꼭 밥상머리 앞에서 싸운다"라며 "남편 눈치도 봐야 하고 애들이 이상한 소리라도 할까 봐 밥 먹는 시간이 편하지 않다.

그런데 이런 게 이 엄마의 일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 엄마 입장에서는 (둘째) 창희가 하고 싶다는 편의점도 내주고 싶은데, 남편 성격을 아니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다"라며 "'니 아버지랑 이혼하고 그 돈으로 해줄게'라는 아들을 꾸짖는 듯한 대사는 그런 속마음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 나이대 우리 엄마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배워온 세대다 보니 항상 참고 살았다"며 "우리 엄마도 그랬다"라고 덧붙였다.

시청자들 역시 곽혜숙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엄마 같다", "엄마 생각나서 눈물 난다", "엄마가 제일 고생이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공감했다.

'해방일지' 이경성 "밥상 앞에서 매일 조마조마…엄마의 일상"
이경성은 배우에게는 개성 강한 캐릭터보다 평범한 캐릭터가 더 소화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자연스러워 보이게 캐릭터를 일부러) 연기하지 말라는 말이 제일 어렵다"라며 "곽혜숙의 경우 감정이 없는 건 아닌데 마치 없는 것처럼 표현해야 해서 절제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감정 연기뿐만 아니라 옷도 늘 목 늘어난 티셔츠에 헐렁한 바지를 입고, 얼굴에는 노곤함이 묻어나도록 기미, 주름 등을 화장으로 그려 넣었다.

지인들은 '시골 아줌마'처럼 나와서 어쩌냐고도 했다고 전했다.

다른 인물들 사이에 파묻혀 도드라지지 않던 곽혜숙의 존재감은 16부작의 드라마가 막바지로 흘러가던 13화에서 폭발했다.

곽혜숙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밥을 하기 위해 압력밥솥을 불 위에 올려두고 방에 들어가 TV 앞에 잠깐 몸을 눕힌 사이 세상을 떠났다.

이경성은 "존재감 없이 살아오던 곽혜숙은 죽은 다음에 존재감이 부각되는데, 그게 엄마들의 삶인 것 같다"며 "항상 옆에 있을 것 같은데 어느 날 돌아가시면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삼남매는 매번 밥상에 꼬박꼬박 올라오던 음식을 직접 차려내며 엄마가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얼마나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했는지 체감하고, 화장한 시신에 타지 않고 남은 인공관절을 보며 그간 엄마가 견뎌온 고된 노동의 무게를 짐작했다.

'해방일지' 이경성 "밥상 앞에서 매일 조마조마…엄마의 일상"
사실 이경성은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박해영 작가에게 곽혜숙이 죽게 된다는 결말을 미리 들었다고 했다.

부재를 통해 존재감이 드러나는 인물인 만큼 연기를 할 때도 튀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고 했다.

매회 담담하게 현실적인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 이경성의 연기에는 호평이 쏟아졌다.

이경성은 TV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사실 1986년 연극 '어두워질 때'로 데뷔한 37년 차 베테랑 배우다.

연극계에서는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로 이달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에도 출연한다.

그는 "사실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용기가 필요했고 겁도 많이 났다"며 "무대에서는 표현이 강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힘을 빼고 집에서 우리 애들한테 얘기하듯이 말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행히 연기도 시대에 따라 스타일이 바뀌는데 요즘은 연극 연기도 예전과 달리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추세라 운이 좋았던 것 같다"며 "'툇마루가 있는 집'에서도 드라마의 엄마 역처럼 현실적인 엄마를 연기하는 데 많이들 보려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