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 교수 '냉전과 새마을' 발간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산물"…사학자가 본 역사적 성격
'새벽 종이 울렸네 /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 새 마을을 가꾸세 / 살기 좋은 내 마을 / 우리 힘으로 만드세'
1972년 4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작사·작곡해 내놓은 '새마을노래'다.

이는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와 함께 1970~1980년대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지붕을 개량하고 마을길을 넓히는 근면·자조·협동을 기본으로 농촌근대화운동이자 지역사회개발운동, 의식개혁운동을 표방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였을까? 그 뿌리와 배경은 뭘까?
허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이런 모습은 박정희 정부가 건설하려 했던 새마을의 한 단면일 뿐이라고 말한다.

신간 '냉전과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연쇄와 분단국가체제'는 새마을의 전모를 동아시아 냉전의 맥락에서 거시적으로 탐구하고, 그 새마을에 기반한 '1972년 분단국가체제'의 역사적 성격을 규명했다.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산물"…사학자가 본 역사적 성격
"새마을, 동아시아 냉전의 산물"…사학자가 본 역사적 성격
허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수립한 분단국가체제는 '냉전의 새마을'을 토대로 삼은 체제이자, 동아시아 냉전의 근대화 원리를 공유·관철한 체제였음을 밝혀낸다.

특히 새마을에 관한 기존 연구가 안보영역을 도외시한 채 개발영역에 국한돼왔다고 지적한다.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저자는 '동아시아-한반도-한국사회'라는 중층적 공간을 관통하고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시간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연구로써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새마을 건설을 '동아시아 냉전'의 맥락에서 새롭게 재조명했다.

1930년대 만주국의 집단부락에서 말라야의 신촌, 남베트남의 신생활촌, 1970년대 한국의 대공(對共)새마을까지 첩첩이 이어지는 역사를 깊이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냉전의 새마을'을 건설키 위해 '대공새마을'이라는 지배체제를 수립했다.

이를 위해 '대공요원-대공조장-대공조원'을 주축으로 한 감시체제에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을 배치했고, 이장과 반장에게는 민방위 책임을 맡겨 안보와 개발의 책임자를 통합시켰다.

대공새마을 지배체제는 공동체 구성원 전부를 감시자이자 피감시자로 만들고, 경찰이 다수의 망원을 배치해 이를 감시하는 중층적 감시체제를 작동시켰다.

공동체 안에서 '내부의 적'으로 분류된 이들은 감시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냉전의 새마을'은 감시와 통제, 정신개조와 사회순화를 지배체제의 수단으로 삼은 박정희와 그 친위세력이 추구한 이상향의 현실태였다.

허 교수는 '냉전의 새마을'에 의거한 지배체제가 지닌 가장 큰 문제로 공동체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권리가 공동체 구성원에게서 박탈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공동체에 적대와 불신을 내장시켜 지배와 동원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분단국가체제에서 민중은 동아시아 열강의 이해 추구와 집권자의 권력 유지 도구로 전락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기제를 가질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국가안보제일주의와 경제성장제일주의를 천명하며 수립된 체제는 국민을 안보와 개발의 주체가 아닌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켰고, 나아가 체제에 적응치 못한 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위험에 빠트렸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1972년 분단국가체제'는 비인간화를 악화·지속하는 체제이자 전근대적 지배원리를 변용한 지배체제였다"고 역설한다.

1968년 1·21사태가 변화를 불러온 직접적 계기였던 이 분단국가체제는 1987년 6월항쟁 등 민주화의 열망 속에 와해해 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새마을과 분단국가체제를 고찰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허 교수는 학문적인 이유를 그 하나로 꼽는다.

지금까지 새마을의 이미지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근대화의 열망과 농촌개발의 신화로 고착돼왔는데, 이제는 시야를 넓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냉전의 결과물로서 새마을을 재고찰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적인 이유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된 채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완충지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냉전·분단시대 체제경쟁의 승리를 위해 비인간화를 강요한 공동체, '냉전 새마을'의 역사적 경험을 숙고해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거다.

저자는 "2022년 올해는 1972년 '유신체제'라 불린 분단국가체제가 등장한 지 50주년이 된다"면서 "이 책이 수많은 이들을 증오와 이념의 노예로 만들어온 분단체제를 완전히 극복하고 한반도의 모든 이들이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라고 말한다.

창비. 596쪽. 2만8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