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펜서' 의상 제작 김동현씨…런던 '새빌로' 테일러 출신
대구 양복점서 무급으로 일하다 런던예술대 유학…최근 귀국해 개업
"본고장 양복 배우러 영국 간 지 6년 만에 왕세자 옷 만들었죠"
"양복에 미쳐서 영국 양복 배우겠다고 갔습니다.

결국 6년 만에 영국 왕세자 배역의 옷을 만들었는데 (작품 속에서) 위화감 없이 등장하는 걸 보니 보람차더라고요.

"
오는 16일 개봉을 앞둔 영화 '스펜서'에서 주인공 다이애나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의 남편 찰스 왕세자(잭 파딩)의 옷을 만든 이는 한국인 테일러 김동현 씨다.

영국 런던예술대에서 맞춤 양복(비스포크 테일러링)을 공부한 그는 런던의 유명 맞춤복 거리 '새빌 로'(Savile Row)에 있는 양복점 '캐드 앤드 더 대디'에서 일하던 중 영화 '스펜서'와 '더 배트맨'의 의상 제작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새빌 로 역시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불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최근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매장을 차린 그를 만났다.

매장 입구에는 영화 '스펜서'의 큼직한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김씨는 "영국 왕세자는 영국 수트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핵심에 있다"며 "한국인인 제가 한국식 양복도 아니고, 영국 정통 양복을 구현해 '영국식'으로 보였다는 게 뿌듯하다"고 했다.

"본고장 양복 배우러 영국 간 지 6년 만에 왕세자 옷 만들었죠"
2020년 여름 그가 일하던 양복점은 고객 발길이 끊기자 영화 '더 배트맨' 의상 제작에 참여했다.

'더 배트맨'은 대형 액션 영화라 매장의 다른 베테랑 재단사들과 함께 같은 의상을 여러 벌씩 제작했고, 김씨는 펭귄(콜린 패럴)이 입는 보라색 패턴이 들어간 수트 등을 만들었다.

그해 겨울부터는 새빌 로가 아예 셧다운 됐다.

나이 든 재단사들은 출근하지 못하고 매장 가까이 살던 김씨가 두세 달 동안 텅 빈 새빌 로로 홀로 출퇴근하며 '스펜서' 속 왕세자가 입는 수트 2벌과 코트 한 벌을 제작했다.

"본고장 양복 배우러 영국 간 지 6년 만에 왕세자 옷 만들었죠"
'스펜서'와 '더 배트맨'의 의상은 재클린 듀런 감독이 총괄했다.

듀런은 '안나 카레니나'와 '작은 아씨들'로 아카데미 의상상을 두 번이나 받은 유명 의상 감독이다.

김 테일러는 "사실 두 영화의 의상 감독이 같은 분인지도,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다"며 "양복점에 속한 직원으로서 주문에 충실하게 작업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찰스 왕세자를 맡은 잭 파딩이 피팅을 하러 왔을 때 한 여성분이 함께 와서 수정을 요구했다.

그분이 듀런 감독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며 "코트 주머니의 높이가 잘못됐다고 지적해 뜯어서 다시 단 일이 있다"고 돌이켰다.

김씨는 국내 대학의 의류디자인학과에 진학했지만 '메이커'가 되려는 자신과 맞지 않다는 생각에 학업을 접었다.

군 제대 후 고향 대구의 한 양복점에 들어가 2년 동안 무급으로 일했다.

"청소하고 커피 심부름만 하다가 일을 배우고 싶다, 가르쳐 달라고 하니 건방지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순수한 마음도 있었고, 미련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2년을 버티다 손님 중 한 분이 런던예술대에 맞춤양복 학과가 있다고 알려주셔서 유학을 결심했죠."
"본고장 양복 배우러 영국 간 지 6년 만에 왕세자 옷 만들었죠"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도 '정통'을 추구하는 양복 산업, 그 상징과도 같은 새빌 로의 유일한 한국인 테일러였던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양복에 미쳐 있었고, 바느질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게 테일러링이라고 생각해요.

변주를 하기 전에 오리지널을 알아야 하고, 그 오리지널이 영국이었던 거죠. 그곳에서 배운 문화를 저의 것으로 만들어서 한국에서 자리를 잘 잡은 뒤 다시 영국에 진출해 인정받고 싶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