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탐사 65년 만에…韓 '에너지 자립 꿈' 현실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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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석유·가스 개발史
박정희때 영일만서 석유 발견
"경제성 없다" 판단 개발 중단
1998년 동해에서 가스전 발견
2.6조원어치 생산한 후 고갈돼
석유공사, 그동안 총 48공 시추
광개토 프로젝트 2년만에 결실
박정희때 영일만서 석유 발견
"경제성 없다" 판단 개발 중단
1998년 동해에서 가스전 발견
2.6조원어치 생산한 후 고갈돼
석유공사, 그동안 총 48공 시추
광개토 프로젝트 2년만에 결실
정부의 예상대로 2035년 동해안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대량 생산되면 우리나라는 석유탐사 시작 65년 만에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설움을 벗는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에 배석해 “매장이 확인될 경우 2035년 정도면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대 140억 배럴 규모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유전이 발견된 덕분에 남미 최빈국에서 신흥부국으로 발돋움한 가이아나의 매장량(110억 배럴)보다 큰 규모다.
한국은 1959년 국립지질조사소가 전남 해남군 우항리 일대에서 처음 석유탐사를 한 이후 에너지 자립의 꿈을 이어왔다. 1964~1977년 포항 지역, 1976~1981년 경남·전남지역에서 탐사를 실시했지만 석유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제정해 국내 해역에서 자원개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대륙붕을 탐사했지만 석유를 찾지 못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석유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밝히자 이튿날 조간신문에 ‘신림동의 한 맥주집에서 손님 300여 명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일제히 기립해 애국가를 불렀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약 1년 뒤 원유층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석유 시추에 대한 꿈은 계속됐다. 1979년 3월 한국석유공사를 설립하면서 자력으로 석유를 개발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에너지 자립에 대한 노력은 1998년 동해-1 가스전에서 양질의 천연가스층을 발견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11번 시추공을 뚫어서 마지막인 11번째에 천연가스층을 찾았을 정도로 극적인 발견이었다. 6년 뒤인 2004년 국내 최초로 천연가스를 생산하면서 마침내 우리나라는 세계 95번째 산유국이 됐다.
하지만 자원 빈국의 갈증을 달래기엔 여전히 아쉬운 수준이었다. 동해 가스전은 2004~2021년 약 4500만 배럴의 가스를 생산하고 고갈됐다. 17년 동안 매출은 2조6000억원, 순이익은 1조4000억원으로 개발 초기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이번 발견은 2022년 ‘광개토 프로젝트’를 수립해 동해와 심해를 비롯한 전해역에서 탐사를 재개한 지 2년여 만의 결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국내 해역에 설치한 시추공은 48개다. 동해에만 27개를 설치했다. 시추공 한 개에 600억~1000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동해부터 화석연료 탐사 경험과 능력을 쌓아야 향후 자원 확보전에서도 선구안을 가질 수 있다”며 “정부 주도로 적극적인 에너지 탐사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브리핑에 배석해 “매장이 확인될 경우 2035년 정도면 상업적인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대 140억 배럴 규모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유전이 발견된 덕분에 남미 최빈국에서 신흥부국으로 발돋움한 가이아나의 매장량(110억 배럴)보다 큰 규모다.
한국, 1959년 석유 탐사 시작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제조강국이면서도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한다. 세계 4위 에너지 수입국이자 9위 원유·천연가스 소비국이다.한국은 1959년 국립지질조사소가 전남 해남군 우항리 일대에서 처음 석유탐사를 한 이후 에너지 자립의 꿈을 이어왔다. 1964~1977년 포항 지역, 1976~1981년 경남·전남지역에서 탐사를 실시했지만 석유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제정해 국내 해역에서 자원개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외국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여 대륙붕을 탐사했지만 석유를 찾지 못했다.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석유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졌다.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밝히자 이튿날 조간신문에 ‘신림동의 한 맥주집에서 손님 300여 명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일제히 기립해 애국가를 불렀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약 1년 뒤 원유층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석유 시추에 대한 꿈은 계속됐다. 1979년 3월 한국석유공사를 설립하면서 자력으로 석유를 개발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에너지 자립에 대한 노력은 1998년 동해-1 가스전에서 양질의 천연가스층을 발견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11번 시추공을 뚫어서 마지막인 11번째에 천연가스층을 찾았을 정도로 극적인 발견이었다. 6년 뒤인 2004년 국내 최초로 천연가스를 생산하면서 마침내 우리나라는 세계 95번째 산유국이 됐다.
하지만 자원 빈국의 갈증을 달래기엔 여전히 아쉬운 수준이었다. 동해 가스전은 2004~2021년 약 4500만 배럴의 가스를 생산하고 고갈됐다. 17년 동안 매출은 2조6000억원, 순이익은 1조4000억원으로 개발 초기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동해 가스전 아쉬움 달래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활발해진 유전개발 사업은 이명박 정부 들어 양적 팽창기에 접어들었다. 2007년 29억달러에 그치던 석유·가스 개발 투자비는 2011년에는 101억달러까지 늘었다. 그 결과 2008년 5.7%에 그친 석유·가스의 자주개발률이 2011년 13.7%로 증가했다. 자주개발률은 한 나라의 석유·가스 소비량을 그 나라의 정부·민간기업이 국내외에서 직접 개발해 확보한 생산량으로 나눈 비율로 에너지 자립도를 나타내는 지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막판 불거진 자원 비리 여파로 10여 년간 화석연료 탐사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이번 발견은 2022년 ‘광개토 프로젝트’를 수립해 동해와 심해를 비롯한 전해역에서 탐사를 재개한 지 2년여 만의 결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국내 해역에 설치한 시추공은 48개다. 동해에만 27개를 설치했다. 시추공 한 개에 600억~1000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동해부터 화석연료 탐사 경험과 능력을 쌓아야 향후 자원 확보전에서도 선구안을 가질 수 있다”며 “정부 주도로 적극적인 에너지 탐사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