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때문에 돈 받는 일을 할 수 없는 기간이 있었는데, ‘일 안하고 얼마나 좋아?’ 이런 말조차 상처가 됐어요. 심플스텝스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큰 위로를 받았어요.”

“미국에 와서 내 일을 하지 않는 게 사실 적성에 안 맞았고 여러 이유로 자존감이 바닥 없이 추락하고 있었는데 심플스텝스에서 다른 분들과 공부하며 으쌰으쌰 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분위기에 휩쓸려, 등 떠밀려 얼떨결에 이력서 내고 인터뷰 보고, 안 되었을 때 다시 일어날 힘도 받고 하시면 좋겠어요.”

최근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 비영리단체 심플스텝스 커뮤니티(슬랙)에 올라온 글들이다. ‘이주 여성의 커리어 성장을 돕는다’는 심플스텝스를 통해 새로운 삶을 열게 되었다는 글들이 넘쳐난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이 뿌리를 내리도록 지원하느라 자기 자신의 커리어까지 챙길 엄두는 내지 못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를 함께 해 줄 작은 동지들이었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심플스텝스가 그 변화를 만들어줬다’고 했다.

심플스텝스는 이력서 작성부터 인터뷰 대비 조언, 일자리 소개, 교육 프로그램 제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을 지원한다. 처음에는 실리콘밸리 지역의 여성들이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미국 전 지역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한인여성들이 심플스텝스에서 ‘외국에서 커리어를 쌓는 방법’을 배워간다. 커리어에 관한 상담은 물론, 새로운 커리어로 전환하기 위한 코딩 공부 등도 여러 슬랙 채널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돌부리들

"한인 여성의 커리어 성장 돕는 '디딤돌' 되어드려요"
실리콘밸리는 스타트업의 성장 요람이다.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김도연 심플스텝스 대표(사진)가 본 세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이 사회에 쉽사리 끼어들지 못한 채 겉도는 이주여성들에게 주목했다. 사실은 그 스스로가 그런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과학고를 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KAIST 경영대학원에서 경영공학 석사과정도 마쳤다. 과학고 내 여성 비율이 10%에 불과하던 시절인 만큼 그는 도드라진 존재였다. 석사를 마친 후 그는 IBM에서 컨설턴트로 일하다 미국 공공정책 전문대학원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로 유학했다. 그가 공공부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남편이 '미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방법도 학교에서 가르쳐준다'며 권유했다. "처음 유학을 결심할 때는 미혼이어서 가벼운 마음이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사정이 달라졌어요.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생겨서 학업을 미룰까도 고민했지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졸업하던 2011년 5월 김 대표(맨 오른쪽)와 동기들의 모습. /김도연 대표 제공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졸업하던 2011년 5월 김 대표(맨 오른쪽)와 동기들의 모습. /김도연 대표 제공
친정 부모님이 ‘너 그러다 주저 앉는다’며 아이를 1년 동안 한국에서 키워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 대표는 하버드대가 있는 보스턴, 남편은 직장이 있는 뉴욕, 아기는 한국에 각각 흩어지게 됐다. 김 대표는 케네디스쿨에서의 첫해를 우울한 시기로 기억한다.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다니는 학교인데 학업이 잘 안 되는 느낌이 들 때는 힘들었어요.”

다행히 이듬해에는 남편이 보스턴에 합류해 세 가족이 다시 뭉쳤다. 하지만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봐 주는 오후 5시 반까지만 대학원 생활을 하고 아이가 온 후엔 육아를 했습니다. 돌아보니 나는 반쪽짜리 대학원을 다닌 셈이었어요. 수업이 아닌 곳에서 이뤄지는 네트워킹 기회, 인턴십 기회 이런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달았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었죠.” 아쉬움도 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수입 없으면 경력단절? ”

그는 뉴욕 UN글로벌콤팩트재단(UN global compact foundation)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생각했던 공공성 있는 비영리기구에서의 근무 경험이었다. 그는 “IBM에서 5년간 컨설팅 업무를 했던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고 했다. UN글로벌콤팩트는 코카콜라, SAP 등 포천100대 기업에 속하는 큰 회사들과 같이 일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담당한 것은 펀드레이징, 자금모집 업무였다. 기부자들과 관계를 쌓고, 이들을 관리하고, 시스템 관리를 받쳐주는 뒷단(백엔드) 작업을 하고, 이사회에 보고를 하는 등의 업무는 그가 하던 컨설팅 업무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는 “처음 일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의 기쁨도 컸지만, 뉴욕 42번가를 가로지르면서 느끼던 그때의 (설레던) 마음은 아직도 기억나요.”

1년가량 일을 한 후에 김 대표는 또 다른 돌부리를 만난다. 비자 문제였다.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무작위 상세 검사 대상으로 걸려 기약 없이 시간을 보냈어요. 기존 근로허가 기간은 만료되었고 영주권은 나오지 않아 월급이 나오는 일은 할 수 없는 기간이 있었는데 절망적이었습니다.”

의지가 있어도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좌절감을 벗어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시야를 바꾸니 새 방법이 보였다. “돈을 받는 일자리는 아니어도 펠로우십, 이사회 구성원, 컨설팅 등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케네디 스쿨 동료들과 교육 비영리단체 '점프'도 공동 창업해서 해외 네트워크 확장, 펀드레이징 등의 업무를 맡았어요.” 그는 “남들은 나를 경력 공백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 스스로는 경력 공백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뉴욕 인근 뉴저지의 위민스(Women’s) 펀드에서 펠로우십으로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이어 아름다운재단 미주법인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기회를 찾았다. “이메일을 보냈으나 연락이 없어 사무실에 직접 찾아갔는데 ‘마침 오늘 직원 한 명이 마지막 근무를 하는 날’이라며 반겨주시더군요.” 그는 사실 자원봉사자라기에는 지나치게 고퀄리티(?)였다. 덕분에 ‘커뮤니티 리더’ 등 정식 직함을 얻고 모집된 자금을 적재적소에 분류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비영리기구가 밀집한 뉴욕과 워싱턴DC를 떠나 실리콘밸리로 옮긴 배경은 남편의 이직이었다. 당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려 고민하던 김 대표에게 실리콘밸리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졌다. 심플스텝스 구상을 굳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민 온 여러 가족들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비슷한 경로로 일을 그만두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일을 하지만, 아이가 둘 이상이 되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터를 떠나죠.”

그는 “어린이집 문제, 비자 문제, 일터의 근무체제 문제 등이 얽혀 있다”며 “개인이 독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노력해야만 조금씩 바뀔 수 있는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무언가 ‘운동(movement)’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

비영리기구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법인 설립 결정과 관련 작업은 오히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하지만 커뮤니티의 형성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입이 닳도록 무엇을 하고 싶다고 설명하면 대부분 ‘좋은 일 하시네요’, ‘응원합니다’, ‘파이팅’ 등의 답이 돌아왔다. ‘같이 하자’는 응답은 찾기 어려웠다. “관심 없는 이들과는 대화가 30초만에 끝나곤 했어요.”

비영리기구에 대한 한국 커뮤니티의 선입견도 넘어야 할 벽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단체를 떠올리거나 프로페셔널이 아닐 것이다, 주먹구구로 운영될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은 그런 일을 안 할 것이다 등등 선입견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미국 사회가 대체로 비영리기구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는 분위기인 것과 대조적이었다”고 했다. “미국에서 (펀딩 규모 등이) 중간 이상 되는 비영리기구라면 직원 급여도 어지간한 일자리 이상으로 충분히 나옵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요.”

하지만 그런 규모 있는 비영리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금을 모으고 이를 사용한 실적(track record)이 쌓여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김 대표는 “남편에게 3년 정도는 월급을 받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했고, 고맙게도 동의를 해 주어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을 ‘보이지 않는 공동 창업자’라고 표현했다.

2017년 창업 후 3년간은 한 명, 한 명을 만나서 세 시간씩 이야기를 하며 이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행사 참석, 프로그램 참여를 부탁하는 '한땀 한땀'의 시간이었다. 2017년 9월 첫 모임에는 30명이 모였다. 풀뿌리로 시작된 비영리기구의 첫 결실이었다.

이듬해에는 좀 더 자리가 잡혔다. 작은 금액이나마 자금을 대는 곳도 생겼다. 회원들에게 이력서 쓰는 법 등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직장생활)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지 않았어요.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기도 했고 외벌이로 먹고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방향을 조금 틀었다. “온라인 전자상거래를 시도할 수도 있고, 학교에 갈 수도 있고, 직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옵션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알려주고, 새로운 커리어를 찾는 사례를 단 한 명이라도 만들어서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죠.”
2019년 9월 미국 팰로앨토에서 열린 심플스텝스 네트워킹 이벤트 '타임 투 샤인(Time To Shine)'  모습. /심플스텝스 제공
2019년 9월 미국 팰로앨토에서 열린 심플스텝스 네트워킹 이벤트 '타임 투 샤인(Time To Shine)' 모습. /심플스텝스 제공

“멋지지 않은 일부터 시작하라”

만약 실리콘밸리에서 회사 최고경영자(CEO)가 되겠다, 글로벌 회사에서 리더로 성장하겠다는 꿈을 꾸는 이주여성이 있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는 “멋이 안 나는 기간을 1~2년 감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첫 번째 스텝은 대부분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는 한국계 회사가 됩니다. 언어 장벽을 크게 낮추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또 파트타임이든 풀타임이든 회계나 데이터분석 등 특정 영역에서 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미국 회사의 해당 분야로 옮기는 길이 열립니다. 큰 회사가 아니더라도 일단 미국 회사로 이직하면 그 다음에 더 큰 회사로 옮길 수 있고, 몇 단계를 거치면 연봉도 몇 배 뛰어오르게 되지요.”

김 대표는 “시간당 25달러를 받는 사무직이라도 일단 시작을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때로는 ‘얼마나 벌겠다고 나가서 그러느냐, 집에서 아이나 보라’는 가족들 반응에 포기하는 회원들도 있습니다. 자기 배우자의 능력과 가능성을 너무 낮잡아 보는 모습에 화가 날 때도 있어요. 반대로 처음에는 큰 기대 안 하다가 아내가 페이스북 등 큰 회사에 취업하는 모습에 가족들이 적극 지원 모드로 바뀌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있는 회원들이 많았던 초기와 달리 현재 심플스텝스의 회원 절반 이상은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일터에서 다양성을 높이는 역할 맡을 것”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 비중이 높아지면서 커뮤니케이션 양상이 바뀐 덕에 심플스텝스를 찾는 이들의 지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실리콘밸리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미국 전역에 이어 캐나다 한국 일본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도 회원이 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고 그는 전했다.
김 대표는 심플스텝스를 지금처럼 한인 여성 중심의 커뮤니티로 유지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다양한 나라의 여성들을 지원한다면 한국어를 중심으로 쓰기가 어려운데, 지금은 교육효과나 네트워킹 등을 한국어로 진행하는 데 따른 장점이 큽니다.”

흔히 쓰는 ‘경력단절 여성(경단녀)’라는 표현에는 부정적이었다. “경력을 보유했다고 하면 되는데,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하고 때로는 ‘싼값에 쓸 수 있는 노동력’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심플스텝스는 앞으로 ‘일터에서 다양성을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부터는 일하는 부모들을 위해 일터의 환경을 개선하는 문제에 관해 기업 컨설팅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미 심플스텝스와 함께 하는 ‘파트너’ 회사들이 40여곳에 이른다. 대부분 실리콘밸리 한인 스타트업 등이다. 이들은 심플스텝스를 통해 좋은 여성 인력을 추천받거나 교육 및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최근에는 코딩부트캠프 회사인 코드스테이츠가 심플스텝스에서 지원자를 받아 그 중 장학생을 선발하고 웹개발 부트캠프 기초반을 함께 운영하기도 했다. 여성 개발자 양성을 원한 코드스테이츠와 여성인재 풀을 보유한 심플스텝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사례다. “이 캠프 출신으로 풀타임 엔지니어가 된 이들이 적지 않다”고 김 대표는 소개했다.

그는 “여성들의 시작을 도와주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멀리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여러 기업에서 한인 여성들이 영향력을 가진 멋진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리더로 성장하려는 여성들을 채용하고 싶은 기업들과 그런 사람이 되려는 여성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심플스텝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김도연 대표(맨 오른쪽 아래)와 심플스텝스 구성원들. /심플스텝스 제공
김도연 대표(맨 오른쪽 아래)와 심플스텝스 구성원들. /심플스텝스 제공
실리콘밸리(미국)=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