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치구서 '주민 자율조정가' 양성…이웃 분쟁 상담·조정
정부·지자체 손 안 닿는 '마을 갈등'에 공동체 차원 해결 모색
[층간소음 시대] ③ 주민이 해결하는 주민 갈등…'공동체'라는 대안
층간소음 문제를 일거에 풀 수 있는 완전한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주택이라는 주거공간의 건축상 문제점, 이웃 간 접촉면이 갈수록 줄어드는 공동체 문화 등 여러 측면이 얽혀 있어 단순히 법·제도의 미비나 특정 정부 부처의 역할만 따질 문제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시공 단계부터 층간소음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층간소음 방지 기준을 맞추지 않은 사업 주체를 '징벌적 손해배상' 등으로 제재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울 시내 최고급 아파트에서도 분쟁이 발생해 화제가 된 데서 보듯 '건물을 잘 짓는 것'이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관련법을 개정하더라도 이는 향후 신축할 건물에나 적용될 기준이고, 이미 오래전 지어진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은 여전히 갈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층간소음이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상의 문제라면 갈등이 불거졌을 때 공동체 내부의 중재와 조정 등으로 해결하는 것이 원만한 갈등 해소의 지름길이라는 의견이 많다.

평소 이웃의 사정을 알고 이해하는 소통 문화 형성도 갈등을 최소화하는 해법 중 하나로 꼽힌다.

서울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주민자율조정가'들이 층간소음 등 이웃 간 분쟁에 개입해 갈등을 원만히 조정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자율조정가들이 관(官)의 공백을 메우고 공동체 차원의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대안이 될지 주목된다.

◇ "우리도 주민입니다" 말에 마음 열어…신뢰 바탕으로 갈등 조정
서울 강동구에는 '강동어울림'이라는 이름의 주민자율조정위원회가 있다.

2019년 서울시와 시민단체의 시정 협치사업으로 진행된 주민 자율조정 양성교육을 수료한 이들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층간소음 등 이웃 간 분쟁을 공동체 차원에서 중재하고자 만든 순수 민간 봉사단체다.

지역에서 그간 봉사활동을 해왔거나 이웃 간 갈등 조정에 평소 관심이 있었던 주민 등 현재 24명이 회원이다.

이 가운데 10여명이 층간소음, 누수, 흡연 등과 관련한 분쟁을 다루는 주민자율조정가로 활동한다.

올해에만 26건의 상담을 접수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을 넘는 65.4%(17건)가 층간소음 갈등이다.

[층간소음 시대] ③ 주민이 해결하는 주민 갈등…'공동체'라는 대안
자치구 및 지역 내 아파트 단지 관리사무소와 연계를 맺고 있어 민원은 구청 또는 관리사무소를 통해 들어온다.

단체에까지 도움을 구할 정도면 아파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위는 이미 넘어섰다는 뜻으로, 이웃 간 갈등이 상당한 수준까지 고조된 '고난도 민원'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장 상담을 나가 당사자들을 만나면 만만찮은 사례를 마주하게 된다.

이미 경찰이 몇 차례 다녀갔을 만큼 관계가 뜨악해진 이웃들, 시끄럽다며 위층으로 둔기를 들고 와 협박하는 아래층, 시도 때도 없이 인터폰으로 폭언이 담긴 항의 전화를 해 상대방을 질리게 하는 세대 등 각양각색이다.

위계유 강동어울림 회장은 "2인 1조로 상담을 하는데 우리가 가도 두려울 때가 있다"며 "너무 자기주장만 앞세우고 우리까지 무시하는 바람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런 것도 다 인내하면서 일단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주면 어느 정도 감정이 누그러지고 그때부터 우리 역할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담을 신청한 쪽과 면담이 끝나면 상대방을 만난다.

상대방이 가해자로 지목된 위층이라면 집 안의 층간소음 유발 요인들에 소음 방지조치를 한다.

이런 과정을 모두 기록한 뒤 피해자 쪽에 틈틈이 상황을 공유한다.

이렇게 해서 양측이 서로 만날 마음의 준비가 돼야만 '3자대면'을 한다.

중재를 진행하다 보면 아파트에서 이웃 간 소통이 얼마나 부족하며, 평소 소통이 있었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임을 느끼는 순간도 많다.

서로 잡아먹을 듯 얼굴을 붉히던 이들이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얽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금세 화해하는 식의 웃지 못할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층간소음 시대] ③ 주민이 해결하는 주민 갈등…'공동체'라는 대안
최경희 사무국장은 "윗집 상황을 자세히 알거나 서로 친한 관계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모르니 사소한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정서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며 "이웃 공동체가 좀 더 활발해진다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과 같은 주민자율조정가에게는 어떤 법적·행정적 권한도 없다.

유일한 무기는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강동구 주민이다"라는 말인데, 상담 대상자들에게 실제로 호소력이 있다고 한다.

'주민이 직접 내 얘기를 듣고 고뇌를 나눈다'는 인식이 라포(신뢰관계) 형성에 매우 유리하다는 뜻이다.

위 회장은 "상담을 시작하기 전 항상 '우리는 행정기관 소속도 아니고 법적 권한도 없는 순수한 봉사단체다.

여러분이 정말 이웃 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며 "그런 말을 하면 상대방도 순수성을 믿어주고, 같은 주민으로서 부드럽게 받아들여 주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자율조정가들이 지역 주민이어서 신속한 대면 상담을 통해 당사자들의 상태와 심리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속도감 있게 조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다.

최 사무국장은 "상담 신청자와 상대방의 진술을 따로 들어보면 주장이 완전히 갈릴 때가 많은데, 서로 만나게 한 자리에서는 객관적 상황만 말하게 된다"며 "자율조정으로는 그렇게 만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고, 빠르면 1~2주 안에도 3자대면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층간소음 시대] ③ 주민이 해결하는 주민 갈등…'공동체'라는 대안
◇ '관(官)의 공백' 메우고 근거리서 신속대응…'공동체 차원 갈등 해결'
시민운동의 한 아이디어로 출발한 주민자율조정 활동은 이웃 간 분쟁에 같은 지역 주민들이 근거리에서 신속하게 대응해 '초기 진화' 가능성을 높인다는 장점이 있다.

예산·인력 등 한계로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미처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공동체 내에서 관리할 수 있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다.

주건일 서울YMCA 이웃분쟁조정센터장은 "층간소음과 같은 종류의 사회 갈등은 공동체의 신뢰가 회복되고, 그 안에서 시민들이 자체적 화해 역량을 갖추지 못하면 기존 제도나 정부 기관의 개입 등만으로는 해결하기 쉽지 않다"며 "모든 주민이 자율조정가가 되지 않더라도, 이런 활동이 확산하면 공동체 차원에서 갈등을 따뜻하게 해결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민자율조정 활동이 본격 시작된 것은 2013년이다.

층간소음이 사회 문제로까지 떠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서울YMCA가 주민 자율로 이웃 간 갈등을 해결하는 활동을 제안했고, 서울시로부터 행정적 지원을 받아 은평뉴타운 제각말 5단지(330세대)에 처음 주민자율조정위를 설치했다.

주민들로 구성된 조정위원들은 갈등 사례 교육과 조정 실습 등을 거쳐 실제로 이웃 간 분쟁 현장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았고, 이웃 간 인사하기 캠페인, 단지 내 '소통 게시판' 설치를 통한 이웃 간 소통 강화, 벼룩시장 활동 등 아파트에서 공동체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은평구에서 자율조정위가 구성된 아파트가 추가로 나왔고, 이런 움직임에 관심을 보인 성동구가 관내 모든 동에서 주민자율조정 교육을 시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같은 흐름 속에 2019년에는 시민단체들과 서울시 협치사업으로 18개 자치구에서 마을 주민자율조정가들이 양성되기도 했다.

주민자율조정제도 도입은 서울 외 여러 지역으로 확대돼 경기도 수원·성남·평택, 광주광역시 등에서도 각자 지역 특성에 맞는 주민자율조정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다만 활동 주체는 주민이더라도 지자체의 지원 의지가 운영 여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성동구처럼 동 주민센터에 주민자율조정센터라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등 적극 지원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강동구에서는 자율조정가들이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업무공간도 없이 뛰어다녀야 할 정도여서 대조적이다.

주건일 센터장은 "지자체가 주민자율조정기구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분쟁 해결 지원조례'를 지자체별로 만드는 방안도 있다"며 "제도가 정착하면 이웃 간 갈등뿐 아니라 아파트 경비노동자 고용 문제, 택배 차량 출입 갈등과 같은 사안에서도 공동체 내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