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길만 교수 '우리 책과 한국 현대사 이야기'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의 집 속에 인간은 산다"고 설파했다.

언어를 인간 존재와 인간 세계의 근거로 인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 언어는 곧 민족 존재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인쇄 문화의 종주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쇄와 출판에서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존하는 세계의 목판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직지심체요절' 또한 현존 금속활자본 중 최고(最古)를 자랑한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의 한국 책문화는 K-팝, K-드라마, K-뷰티 등과 더불어 격동의 변화를 겪으며 세계 무대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부길만 동원대 명예교수는 신간 '우리 책과 한국 현대사 이야기'에서 "20세기 국력의 신장은 교육과 출판을 통하여 국민 의식을 확장하고 고양시켰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학교 교육, 가정 교육, 사회 교육 등 교육의 마디마디에서 출판은 핵심 매개체로서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것이다.

이번 책은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온 수많은 저작자와 출판사들의 노력을 근현대 중심으로 담아낸 기록서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출판 강국으로 부상한 배경에는 어떤 혼란 상황에서도 책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던 민족의 열정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의 20세기는 온갖 악조건과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일궈낸 놀라운 세기입니다.

초엽부터 노골화한 외세의 침탈과 국권 상실, 국토 분단, 민족상잔의 비극, 극도의 빈곤, 군사정변, 독재정부라는 최악의 시대 상황 속에서도 급속한 산업화를 통해 비약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학생과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했으며, 최근에는 예능을 전 세계에 널리 펼치고 있습니다.

"
국가 발전과 함께 출판 산업도 크게 발전했다.

해방 이후 교육인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함께 도서 소비도 계속 늘어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100만 부 이상 팔리는 밀리언셀러가 등장할 만큼 출판시장도 크게 확대됐다.

신간 발행종수 역시 꾸준히 증가해 1950년대에 2천 종에도 못 미치던 것이 1979년 1만 종을 넘어섬으로써 세계 10위권의 출판대국으로 부상했다.

저자는 출판의 이런 발전 과정을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간다.

일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한 출판인들, 그때 나온 금서들, 일제 강점기에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한글학자들의 의지와 용기, 해방 공간에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우리말 서적들, 산업화·민주화에 앞장선 출판문화계의 활동 등을 찬찬히 들려준다.

그동안의 책 문화를 둘러싼 안타까움도 컸다.

책 문화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나가야 하는데, 근래까지만 해도 우리의 경우는 문자 때문에 세대 간 단절을 감내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책은 한자이고 아버지의 책은 일본어이다 보니 해방 이후에 태어난 한글세대는 그 책들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한글이 창제된 것이 조선시대 전기인 1443년인데, 1970년대에 와서야 한글세대가 등장했다니, 우리 역사의 비극입니다.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하층 민중까지도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지만, 수백 년 동안 한글은 공용어가 될 수 없었습니다.

"
책은 시대 구분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두 시기로 나누고, 해방 이후는 다시 미군정기, 제1공화국 시기, 1960년대, 1970년대로 세분한 가운데 각 시기 안에서 주제별 문답 형식으로 하나하나 서술해나간다.

저자는 이번 책의 자매편에 해당하는 '우리 책과 한국사 이야기'를 지난해 3월에 출간해 고려시대부터 20세기 초엽까지의 출판 역사를 들려준 바 있다.

유아이북스. 248쪽. 1만4천원.
"오늘의 우리는 책이 만들었다"…출판 현대사 기행
/연합뉴스